스타강사 이만기의 언어영역 해부
우리 민족이 한국어라는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구상에 있는 여러 언어 가운데 개별 언어 한 가지를 쓴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 민족의 문화와 세계 인식이 한국어에는 녹아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아프리카에 있는 어떤 종족은 무지개의 빛깔을 세 가지로 표현한다고 한다. 우리의 옛 기록에는 무지개를 백색이나 오색으로 표현하였고, 최근에는 일곱 가지 빛깔로 표현하는데 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무지개가 실제로는 어디 일곱 빛깔뿐이었겠는가? 과학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훨씬 더 많은 빛깔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지개를 언어로 추상화할 때 문화권에 따라 이렇게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무지개라는 외계 현상에 대하여 그것을 인식하는 문화의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경우도 한자의 청록(靑綠)에 대해 우리말은 구분하지 않고 있다. ‘푸르다’는 말뿐이다. 하늘도 ‘푸르고’, 풀도 ‘푸르다’라고 표현한다. 빛깔의 색상이 엄연히 다른데도 이 두 가지 빛깔에 대한 우리말은 ‘푸르다’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일상 생활에 불편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세계 인식의 차이이며 문화의 차이이다.
이러한 세계 인식은 여러 면에서 나타난다. ‘사촌’이라고 할 때, 우리는 ‘친·외·내종·외종’ 등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영어에서는 ‘cousin’으로 이를 통틀어 표현할 뿐만 아니라, 일가·재종·삼종까지도 뜻할 수 있다고 한다. 가족 관계에 대한 표현에서 우리말이 저들보다는 좀더 자세한 편이다. 그러한 관계를 ‘cousin’이라는 하나의 낱말로 나타내기보다는 사촌은 물론 가족 관계를 좀더 자세히 표현하여 의미를 나눈 것이 우리의 문화이고,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저들의 생활이고 문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문화에 따른 이러한 차이는 낱말에서만이 아니라 동사 활용에 있어서도 나타난다. 우리말에는 피동형이 발달되지 않았다. 머리를 다듬고 싶을 때, ‘머리를 깎이러 간다.’는 말은 하지 않고, 또 ‘머리를 깎였다.’는 표현도 잘 하지 않는다. ‘머리를 깎으러 간다.’거나 ‘깎았다’라고 말한다. 얼핏 보면 피동형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것 같다. 머리를 분명히 이발사에게 깎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하면 이발사는 제 마음대로 남의 머리를 깎은 것이 아니다. 주인공인 내가 깎으라고 해서 깎은 것이니 깎은 주체는 ‘나’다. 이러한 생각이 밑바탕이 되어 우리는 ‘머리를 깎았다.’라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스스로가 깎은 것이 아니라 남을 시켜 깎은 것이라는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누가 ‘머리를 깎이었다.’고 표현하였다면 그것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머리를 깎이었다는 뜻으로 이해하기 쉽다.
정재호 ‘언어에 투영된 민족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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