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왕자 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초판이 나온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어른을 위한 동화’의 전형이 되었다. 작가의 뜻을 받들어 표현한다면, 이젠 ‘어른 왕’이 되어 버린, 한때는 모두 ‘어린 왕자’였을 사람들을 위한 동화의 고전이다. “사람들이 내 책을 건성으로 읽는 걸 원치 않는다”는 작가의 바람처럼, 각 쪽을 꼼꼼히 읽다 보면 왕처럼 근엄해지고 인생의 모든 것을 다 알아 버린 어른들도 삶의 지혜를 가득 길어 올릴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왕자가 여우를 만나는 대목은 이 작품의 백미다.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묻고 있는 이 대목은 작가의 ‘커뮤니케이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매체(mass media)에 더하여 다중매체(multi-media)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우의 가르침은 ‘인간-미디어-인간’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촉구한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지구에 도착한 어린 왕자는 여우를 만난다. 여우는 왕자에게 제발 자신을 길들여 달라고 한다. ‘길들이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왕자에게 여우는 답한다. “그건 ‘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뜻이야.” 그러고는 관계를 만들어 가려면 어떻게 하는 건지 일러 준다. “참을성이 있어야 해…. 처음에는 내게서 좀 떨어져 이렇게 풀밭에 앉아 있어. 난 너를 흘끔흘끔 곁눈질해 볼 거야…. 날마다 넌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게 될 거야….” 그러다가 아무 간격 없이 붙어 앉게 되면 길들이기는 완성된다. 이 완성의 단계가 뜻하는 건, 서로 소통하고자 하는 두 존재 사이에 어떤 매체(media)도 끼어들거나 매개(mediate)하지 않는 즉각적이고 비매개적인(im-mediate) 관계이다. 여우는 육성언어의 미디어조차 거부한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은 오해의 근원이야.”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이 흔히 놓치는 건, 여우가 왕자에게 길들여 달라고 애원하지만 거꾸로 그가 왕자를 길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왕자에게 참을성 있으라고 하고, 좀 떨어져 있으라고 하며,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고, 곁눈질하는 사이 조금씩 다가앉으라고 주문하는 것은 여우이기 때문이다. 여우는 왕자에게 길들이기를 가르치면서 왕자를 길들인 것이다. 중요한 건, 여우가 길들이기를 완성하는 순간 그와 왕자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어들지 않기 때문에 둘은 즉각적으로(im-mediately) 합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우도 자연히 왕자에게 길들여지는 상황이 된다. 길들이는 자가 곧 길들여지는 완벽한 접촉의 관계, 그것이 생텍쥐페리가 간절히 원하는 인간적 소통의 진의이다. 이는 그가 <인간의 대지>에서 “진정으로 합류하려고 시도해야만 한다”고 한 말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 우리의 현실과 너무 먼 요구인지 모른다. 오늘날 미디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수시로 끼어들며 매체 자신이 사람과 즉각적으로 밀착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우리는 휴대전화로 소통하는 상대와는 서로 연락이 뜸할 수 있지만, 휴대전화를 놓고 다니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는가. 매체는 사람 사이를 매개하지만 매체 스스로는 사람과 비매개적(즉각적) 관계로 밀착한다는 역설, 이것이 오늘날 미디어의 이중성이며 미디어의 힘이다. 복합 미디어의 시대, 우리가 매체에 길들여지는 것만큼이나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길들이기를 실천하는 균형의 지혜가 필요하다.
영산대 교수 anemoski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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