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7. 나의 투쟁, 파시즘의 유혹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 [난이도 수준-고2~고3]
5. 프로파간다, 환상과 허상의 경계선
6. 아파트, 대한민국을 접수하다
- 거주문화의 비밀
7. 나의 투쟁, 파시즘의 유혹
아파트에서는 끊임없이 신발을 신고 벗는다. 집 안에 들어서려면 먼지 묻은 신발을 벗어야 한다. 그러곤 양말 차림이거나 실내화를 신고 거실로 향한다. 베란다와 화장실을 갈 때면 플라스틱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방 안에서는 맨발이나 양말 신은 채로 지낸다. 그래서 집 안 문턱마다에는 신발들이 굴러다니기 마련이다. 이는 한옥에서 흔히 보는 모습이기도 하다. 방 안에서는 맨발로 있다가 화장실, 부엌으로 갈 때면 신을 신어야 한다. 안마당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대문 밖으로 나갈 때는 슬리퍼 대신에 외출용 신발로 갈아 신는다. 이처럼 우리네 아파트는 서양의 주택보다는 한옥에 더 가깝다. 안마당은 거실로, 뒷마당은 베란다로, 다락은 다용도실로 바뀌어 아파트 안에 자리를 잡았다. 마당 구석에 있던 장독대와 자잘한 물건들도 아파트 복도에 자리를 잡았다. 난방도 온돌을 흉내 낸 바닥에 깔린 온수 파이프로 이루어지곤 한다.
이쯤 되면 아파트가 왜 우리나라에서 인기인지 짐작이 갈 만하다. 우리네 아파트는 서양의 아파트먼트(apartment)와 다르다. 아파트는 우리네 생활습관에 많이 익숙해진 모양새를 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아파트 단지 또한 전통적인 마을과 닮은꼴이다. 예전 동네 어귀에는 커다란 정자나무가 서 있곤 했다. 그 아래에서 노인들이 평상에 앉아 바둑을 두었다. 이들은 자연스레 마을 지킴이 역할을 했다. 마을 어귀를 나다니던 사람들은 노인의 눈길을 피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아파트 단지 입구도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 평상이 ‘관리사무소’로, 마을 노인이 ‘경비아저씨’로 바뀌었을 뿐이다. 마을은 산과 강을 경계로 옹기종기 자리잡는다. 아파트 단지는 차가 다니는 넓은 도로로 다른 동네와 나뉜다. 단지는 대개 근린주거 개념(neighbourhood unit)에 따라 설계되었다. 큰 도로를 건너지 않고서도 같은 블록 안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쇼핑을 하는 등, 대부분의 생활을 해결하는 구도라는 뜻이다. 우물가에서 아낙네들의 모임이 이뤄졌듯, 지금의 주부들은 단지 내 스포츠센터 등에서 만난다. 상가의 보습학원은 마을에 있던 서당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아파트는 우리의 전통적인 삶과 묘하게 닮은꼴이다. 프랑스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Val<00E9>rie Gel<00E9>zeau)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숙하기에 되레 잘 보이지 않았던 진실을 일러준다. 우리에게 아파트는 더 이상 ‘집’이 아니다. 오히려 유목민의 텐트에 가깝다. 유목민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으며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도시인의 삶도 별다를 바 없다. 직장에 따라, 학교에 따라 거처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매매 거래가 많아서 쉽게 사고 팔리는 아파트는 이동이 많은 삶에 알맞은 주거형태다. 또한, 아파트는 생활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상품’이라는 측면이 더 강하다. 아파트의 이름부터도 그렇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에는 동네 이름이 붙었다. 종암 아파트, 마포 아파트 등등. 그러나 어느 순간 아파트 이름에는 건설회사명이 쓰였다. 현대아파트, 한양아파트처럼 말이다. 지금은 아파트 이름에 래미안, e-편한세상 등 ‘브랜드’가 붙는다. 이제 아파트는 여느 상품들처럼 브랜드로 통한다. 이 지점에서부터 아파트는 우리네 악습과 맞닿기 시작한다. 끼리끼리 무리 짓고 차별하는 습관 말이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신분마다 사는 지역이 달랐다. 여기에는 교통수단이 좋지 않아서 직장과 집이 멀리 떨어질 수 없었던 까닭도 있었다. 예컨대, 광교에서 효경교(종묘 앞에 있던 다리)에 이르는 중촌에는 역관과 화원(畵員), 의관(醫官) 등 기술직 공무원들이 모여 살았다. 중촌 밑 아랫대(지금의 광장시장 주변)에는 군인들이 많이 살았다. 동대문운동장 부근에 어영청, 동별영, 훈련원 등 군사 기지가 자리잡았던 까닭이다. 지금의 아파트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어떤 동네에 사는지, 그것도 어떤 브랜드의 아파트에 거주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심지어 평수에 따라서도 ‘신분’을 칼같이 나누려고 한다. 평수 작은 아파트에 사는 이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단지 안에 담을 쌓는 모습은 코미디 속의 장면이 아닌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더더욱 좋은 동네의 아파트, 넓은 평수에 집착할 수밖에 없겠다. 아파트를 옮기는 것은 ‘신분’을 바꾸는 일처럼 되어버렸다. 아파트로 가득 찬 서울을 가리켜 발레리 줄레조는 ‘하루살이 도시’라고 부른다. 잘 지은 아파트의 내구 연한은 50년 남짓일 뿐이다.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아파트들은 흔적도 없이 헐리고 새로 지어진다. 세월에 따라 쌓이는 정과 추억은 아파트에 자리할 곳이 없다. 아파트는 한국인의 정서와 욕망, 그리고 허점을 오롯이 담고 있다. 아파트 문화에 대한 반성이 대한민국을 ‘리모델링’ 하는 출발이 될 수 있는 이유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_timas@joongdong.org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