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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수능출제 정책 2004년 판박이학생입장 간과한 ‘탁상공론’

등록 2010-03-28 19:36

이범 교육평론가
이범 교육평론가
2004년 2월, 교육부 장관은 교육방송 강의를 수능 출제에 연계하여 사교육비를 잡겠다고 선언했다. 국민들은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일거에 사교육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묘안처럼 보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수능이 EBS에서 다 나오면 학교에선 뭐 하란 말이냐’며 공교육의 붕괴를 우려하기도 했다. 교육과정평가원에서 주관하는 6월과 9월 모의고사가 EBS 강의와 연계되어 출제되기 시작했고, 이윽고 수능을 치르고 나서는 반영률이 80% 이상이었다고 발표되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EBS 교재에는 어차피 다른 교재에도 나올 법한 유형과 내용이 많기 때문에, EBS 반영률이 그리 높게 체감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EBS는 교재 출판비용(189억원)의 2배가 넘는 382억원을 이익으로 챙겼다. 그리고 그해 겨울, 메가스터디는 EBS가 몸값을 올려준 스타강사들을 대거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데자뷔(deja vu)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장관 이름이 ‘안병영’에서 ‘안병만’으로 바뀌었다는 것 정도? 따지고 보면 1989년, 1997년에도 교육방송 강의를 대학입시와 연계한다고 하여 비슷한 소동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무려 네번째 반복되는 테마인 것이다.

교육방송 강의가 사교육비 절감 효과가 없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EBS는 다양한 양질의 강의를 제공함으로써 사교육비 절감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약점으로 지적되던 프로그램 기획력도 개선되고 있다. 문제는 EBS 강의를 수능 출제와 연계함으로써 사교육비를 한층 더 절감하겠다는 발상이다. 이것은 수험생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왜 탁상공론이냐고? 학생들 처지에서 보면 일단 그 많은 EBS 강의를 다 듣는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언어·수리·외국어영역 3과목에 더해 탐구영역 중 자신이 선택한 과목들의 강의까지 다 들으려면 1000시간이 훌쩍 넘어간다. 학교를 안 가고 강의만 들으면 모를까.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강의는 듣지 않고 교재만 보더라도 교육방송 수능교재 115종을 다 봐야 한다. 100% 연계되어 출제된다면 한번 도전해볼 만도 하지만, 약오르게도 이걸 다 봐도 70% 연계된단다.

사교육업계에서 이러한 허점을 파고들어 이미 2004년에 짭짤한 재미를 본 상품이 있다. EBS 요약강의! EBS 교재를 모두 볼 수 없는 수험생들을 위해서, EBS 교재 가운데 어느 교재에나 나올 법한 보편적인 부분은 제외하고, 특이한 소재와 새로운 유형만 간추려 강의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올해도 분명히 여름방학을 앞두고 전국의 학원가에서 이러한 기획상품을 쏟아낼 것이다. 수험생 처지에서 생각해 보라. 그 많은 EBS 교재들을 다 훑어볼 것인가, 아니면 학원가에서 제공하는 요약강의를 들을 것인가?

2004년과 달라진 부분이 있기는 하다. 2004년과 달리,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홍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자신은 이 정책이 성공할 것이라고 강하게 믿고 있는 듯하다. 물론 대통령의 식견이 부족한 것을 탓하기는 어렵다. 어찌 대통령 혼자서 이러한 전문 분야의 세부적인 문제들을 모두 챙기고 예견하겠는가? 문제는 대통령의 참모진 가운데 이 정책이 2004년의 복제판에 불과하며, 2004년의 성과는 물론이요 한계마저도 고스란히 계승할 수밖에 없음을 직언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는 점이다. 진정한 위험은 여기에 있다. 이것이 2010년, 대한민국 교육정책의 현주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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