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충남태안중 ‘연극’으로 자아 찾는 아이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스승이 되어 배우고 또 가르칩니다. 행복이 성적순이 아니라면, 입시 전쟁이나 학원 폭력 같은 말이 사라진다면 말이죠. 마음을 열어 상대와 이야기하고 자부심을 갖는 게 아이들이 배워야 할 지혜라는 것, 시들어 가는 교육 현장에서 부지런히 희망의 불꽃을 피워 올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돕는 선생님과 아이들이 함께 만드는 사연을 들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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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수업에 참여한 충남 태안중 1학년 4반 학생들이 풍선을 불어 공중에 높이 띄우는 연극 놀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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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5년 충남 태안중학교 1학년 4반 연극 수업 종이 울렸다. 아이들이 우당탕 뛰어들어왔다. 순서대로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아직 쉬는 시간이 남았는데, 개구쟁이 중1 남자 아이들을 이토록 얌전하게 만든 건 무엇일까? 지난 4일 토요일 4교시. 충남 태안군 태안중 다목적 연극실에서 1학년 4반 학생들의 재량활동이 시작됐다. 일주일 내내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연극 수업. 월요일 1교시였다가 ‘연극 수업 뒤엔 아이들이 너무 흥이 나서 다음 수업에 집중을 못한다’는 담임 교사의 호소로 한 주의 맨 끝으로 재배치된 바로 그 수업이었다.
“풍선을 하나씩 나눠 줄게요. 불어서 공중으로 띄우세요. 띄운 풍선은 각자 것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것이에요. 누구 것인지 따지지 말고 풍선을 높이, 높이 띄우세요.”
마흔 개의 풍선이 날아올랐다. 아이들은 부딪치고 넘어지면서 풍선을 띄웠다. 연극 수업 지도교사인 가덕현(43) 교사는 말했다. “풍선을 높이 띄우는 건 풍선을 존중하는 마음, 풍선의 임자인 누군가를 존중하는 마음이에요.” 수업 전반부는 이처럼 몸 풀기를 겸한 ‘연극 놀이’로 채워졌다. 후반부는 본격적인 연극 수업인데, ‘상상하며 이야기 만들기’를 했다.
“들고 온 소지품을 만지고 가만히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만드세요. 물건에 얽힌 추억을 상상하는 거예요.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세요.”
속닥속닥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첫째 모둠에서 가장 ‘말발’이 센 아이는 평소엔 좀처럼 나서는 일이 없는 이혁주(13)군이었다. 지갑을 손에 든 용덕이는 ‘우연히 지갑을 주웠는데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로 시작되는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꾸며냈다. 자기 모둠에서 5분 넘게 이야기를 풀어낸 까닭에 반 전체 친구들 앞에서 발표도 했다. “연극이 굉장히 어려운 건 줄 알았거든요. 근데 알고 보니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예요. 얘기 만드는 게 뭐 어려운가요?” 용덕이는 방금 자신이 서사 문학 장르의 핵심인 ‘내러티브(이야기)’를 단숨에 구성했다는 것까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2. 1993년 태안 남면중학교
삼심대 초반의 가 교사가 태안군 남면 남면중(현 서면중)에 부임했다. 태안은 지금도 비평준화 지역이다. 남면 아이들은 조금만 형편이 돼도 ‘시내’, 곧 태안 읍에 있는 중학교로 전학하고, 태안고 입학을 위해 달음박질을 친다. 면에 남은 아이들은 외롭고 쓸쓸하다. 한부모 가정, 조부모 손에 크는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어린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중학생 가장도 있었다. 가 교사는 아이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오는 재미, 고된 일상을 잊고 뭔가에 열중하는 재미를 느꼈으면 했어요. 저 자신도 연극이란 게 뭔지 몰랐을 때예요. 그저 아이들을 모으고 대본을 구해 대사를 외면서 동작 연습을 하고…. 학원 가는 아이가 없으니까, 농사를 도울 때를 빼곤 해가 저물어 버스가 끊어질 때까지 연극을 했어요.”
면사무소 뒤 어설픈 야외 무대에서, 아이들은 진눈깨비가 휘날려도 집에 가지 않고 연극에 몰두했다. 관객 없는 연극의 주인공은 온전히 아이들이었다. 대본도 직접 썼다. 남면에 살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생생하게 담긴 작품이 나왔다. <얘들아! 연극하자>와 <병구의 꿈>을 쓰고 공연했던 아이들은, 지금 농사를 짓고 횟집을 하고 신발 장사도 한다. 아이들은 가끔 전화를 한다. “선생님! 언제 횟집 한번 비울테니까 우리 다 같이 모여서 연극해요. 밤새도록 같이 놀아요.” 남면 아이들에게, 연극은 여전히 신나는 놀이다.
#3. 그 아이, 현성
김현성(18)군은 가 교사가 태안읍 근흥중학교로 옮겨 좀더 본격적인 ‘교육 연극’을 해 보려 할 때 만난 아이다. 어릴 적 부모와 떨어져 고아원에서 자란 현성이는 당시 아빠와 새 엄마와 배다른 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예민한 감수성과 돌출 행동으로 주변을 놀라게 하는 아이. 성적은 전교 꼴찌였고 수업 때는 잠만 잤다. “도무지 내가 태어난 이유를 알 수 없었다”고 현성이는 털어놓았다.
현성이가 연극반에 들어오겠다고 한 것도, 연기를 기막히게 잘한 것도 놀라자빠질 일이었다. 1학년 때 교내 연극제에서 ‘연기 대상’을 거머쥔 현성이는 3년 내내 ‘밥 먹고 연극만’ 하며 일취월장하더니 태안고에 연기 특기생으로 입학했다. 고교 근처에도 못 갈 줄 알았던 현성이가 태안군 일류로 꼽히는 고교에 들어간 것이다. 현성이는 고등학교에서도 연극만 해 왔다고 했다. 올해 고3이 된 현성이가 자랑을 늘어놓았다. “서울에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녀왔어요. 고등학생 40명 뽑아서 2주 동안 레슨을 하거든요. 선생님, 나 그 학교 갈까요?” 현성이는 이제 대학에 갈 꿈을 키우고 있는 것 같았다.
#4. 2005년 태안중 연극 동아리 모임
태안중은 지난해 연극 시범학교로 지정됐다. 덕분에 다목적 연극실이 생겼다. 교실 두 개를 터서 넓은 연습 공간을 만들고 조명·음향 시설이 딸린 무대도 갖췄다. 서울에 있는 극단을 초청할 수 있을만큼 괜찮은 시설이다. 전교생 모두 연극을 경험할 수 있었다는 점도 소득이다. 지난해 태안중은 교내 연극제를 열었다. 몇몇 재능 있는 학생들만 참여하는 게 아니라, 한 반을 두 모둠으로 나눠 모든 모둠이 참여했다. 지금 2·3학년생들은 지난해 연극제를 준비하면서 연극의 재미를 마봤고, 올해 입학한 1학년생들은 일주일에 한 시간 재량활동 시간에 연극 수업을 한다. 그런 아이들이 연극 동아리 두 개를 꾸렸다. 연극 놀이반 ‘몸과 마음’과 연극 공연반 ‘뿌리’다. 지도교사는 물론 가 교사다.
“10년 동안 아이들과 연극으로 만났는데, 학교를 옮기면 또 새로 시작해야 해요. 해마다 아이들이 바뀌니까 늘 새롭죠. 교육 연극은 공연이 아니라 교육에 목적이 있어요. 몇 편을 무대에 올렸고 몇 번 입상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아이들이 연극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소중히 여겼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4일 오후, 연극 동아리 아이들이 ‘장면 만들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나무를 심는 사람>이라는 대본을 토대로 떠오르는 장면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대본에는 ‘한 줄로 걸어 들어온다’고 돼 있는데, 천천히 걷는 아이, 뛰듯 걷는 아이, 허리를 구부리고 걷는 아이 등 모두 제각각이다.
“처음에는 창피했거든요. 없는데 있는 것처럼 시늉을 하는 게 우습잖아요. 그런데 자꾸 하니까 지금은 뻔뻔해졌어요. 이제 낯선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잘해요. 예전에는 수줍음을 많이 탔거든요.” 연극 공연반 반장인 3학년 이용규(15)의 말이다.
낯선 이에게 마음을 쉽게 여는 건 용규만이 아닌 듯했다. 지난 3월 태안중에 부임한 조성숙 미술 교사가 귀띔했다. “교직 생활 20년에 이렇게 살가운 남자 중학생들은 처음 봐요. 나를 몇 번이나 봤다고 슬쩍 팔짱을 끼면서 ‘선생님, 어디서 전근 오셨어요?’ 하고 말을 걸잖아요. 하도 기특해서 얼굴을 찬찬히 살펴봤어요. 애들 눈, 참 이쁘죠.”
태안/글·사진 이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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