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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더디게 꽃피는 아이들

등록 2005-06-12 16:53


특수학교 교단일기 아이들 웃음 한조각 ‘똑똑’마음의 문 두드리네

지은아. 실은 이게 네 이름인지도 잘 기억이 안 나. 초등학교 1학년 때였지. 매일 아침 엄마 등에 업힌 채 교실에 들어서던 네 모습이 생생하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다른 건 기억이 하나도 안 나. ‘소아마비’가 무슨 뜻인지는 몰랐어도 네 다리가 불편한 건 전교생이 다 알았을텐데, 너는 어떻게 화장실엘 갔고 체육 시간에는 무얼 했으며 쉬는 시간엔 누구와 공기 놀이를 했니?

미안. 나는 네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어. 따돌림을 받고 있었거든. 다른 아이들은 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데,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나는 서울 말밖에 할 줄 몰랐지. 아이들은 내게 ‘불여시’라는 별명을 붙이고는 내가 말을 꺼내기만 하면 놀려댔어. 나는 결국 입을 꾹 다물고 말았지. 생각해 보면 너와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자기가 속한 세상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던 건데, 왜 나는 한번도 네게 손을 내밀지 않았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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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조금 느려도 괜찮아>라는 책을 보다가 네 생각이 났어. 공립 정신지체 특수학교인 서울 정문학교 선생님들이 찍은 아이들 사진과 교단 일기를 엮은 책이야. 3년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았다고 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낯선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이 친구들이 이렇게 활짝 웃으려면, 어찌 3년 뿐이겠니? 더 긴 세월 동안 더 깊은 사랑을 나누었기에, 사진기가 아니라 선생님을 향해 이렇게 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겠지.

김길옥, 박로사, 백진희, 이수정, 이화정, 조성연. 여섯 명의 선생님들은 남들이 ‘참, 힘들겠다’거나 ‘당신은 천사인가 보다’라고 말할 때 제일 당황스럽대. 그래서 이 책을 만드셨대. 정신지체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들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눈과 배꼽 잡게 만드는 유머 감각을 갖고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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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들은 이렇게 말씀하셨어. “밥 먹고 옷 입고 세수하고 공부하고. 생각해 보면 누구나 처음부터 이 모든 걸 완벽히 해낸 건 아니었다. 아기 때부터 반복하고 연습해서 능숙해졌을 뿐. 세상 사람들은 우리 아이들을 보며 ‘보호’나 ‘도움’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지만, 처음부터 모든 게 완벽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 아이들이나 세상 사람들이나 모두 똑같다.” 일곱 살 병현이가 혼자서 목을 가누는 연습을 하면 “혼자 할 수 있는 것을 늘려 가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하시고, 자폐아인 솔이가 혼자 무언가 하고 있으면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남보다 조금 느릴 뿐”이라고 생각하신대. 그리고 기다리시는 거야. 조금 느려도 괜찮으니까.

나는 석 달쯤 뒤에 사투리를 배웠어. 조금 느려도 괜찮다고, 사투리를 가르쳐 주겠노라고 다가온 친구가 있었거든. 그 친구는 내게 서울 말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대. 그거 알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있으면, 비장애인이 훨씬 더 행복해진다는 사실. 내가 너의 존재를 빨리 알아채고 친구가 되었더라면, 나는 ‘조금 느려도 괜찮은’ 삶의 진리를 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을텐데. 언젠가 다시 만나면, 내가 꼭 널 먼저 알아볼 거야. 보고 싶다, 친구야. 전학년. 아이빛그림 사진·글-이레/1만1천원. 이미경 기자 friend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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