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한 왕자’
1888년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가 표제작인 동화집이 출간되었을 때, 당시 평단은 그를 안데르센에 비견하였다. 우리 청소년들도 ‘행복한 왕자’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사파이어로 된 두 눈을 비롯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왕자는 더없이 감동적이다. 이렇게 보면 ‘행복한 왕자’는 남을 위해 희생하는 이타주의의 도덕적 교훈을 담고 있는 동화다. 하지만 행복한 왕자의 이야기는 이런 내용만 담고 있을까? 이 작품의 주인공은 행복한 왕자일까?
먼저 이 두 번째 물음에 답해 보자. 움베르토 에코는 역사상 가장 탁월한 소설의 제목으로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를 든다. 문학 작품의 제목은 그 주제와 내용을 뻔히 짐작하게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뭔가 감추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삼총사>의 진짜 주인공은 제4의 사나이 달타냥인데 그는 제목에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도 탁월한 제목이다. 왕자의 처지에 대한 복합적 의미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진짜 주인공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제비다.
<행복한 왕자>를 읽으면서, 와일드가 이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이미지를 머리에 떠올려 보자. 한편으로는 도시 중심에서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기둥 위에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왕자의 동상이 있다. 다른 한편으론 도시 변두리에 사는 상처투성이 손의 재봉사와 병든 아들, 너무 굶어서 정신을 잃고 책상에 엎드려 있는 젊은 희곡 작가, 길모퉁이에서 혹한에 떨고 있는 맨발의 성냥팔이 소녀가 있다. 이 두 가지 극단적으로 상반된 세계의 칙칙한 이미지가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절’이다. 즉 모든 소통의 배제이다.
부유한 세계와 가난한 세계 사이의 완벽한 단절은 갈등조차 유발하지 않는다. 두 세계 사이에 있는 것은 절대 무관심이다. 그것은 무거운 침묵의 이미지로 이야기 전체를 억누르고 있다. 적어도 쾌활하고 진솔한 성격의 제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제비의 등장은 이런 이미지를 일순 바꾸어 놓는다. 제비는, 이러한 단절의 고통을 앓으면서도 어찌 할 수 없는(“발이 받침대에 단단히 붙어 있어서 난 움직일 수가 없구나.”) 사실 ‘불행한 왕자’와 역시 세상과 단절된 채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기꺼이 연결한다. 제비는 겨울을 맞아 얼어 죽을 때까지 이 암울한 상황에 ‘소통의 다리’를 놓음으로써 두 세계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제 불행한 왕자도 행복한 왕자가 되었고 사람들도 행복해졌다.
불행과 불행 사이에는 절대 무관심이 도사리지만, 행복과 행복 사이에는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하게 존재한다. 제비의 희생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단절된 두 세계 사이의 소통을 완성해 놓고 죽음을 맞는 제비는 달관한 철학자 같다. “전 죽음의 집으로 가려 해요. 죽는다는 것과 잠이 든다는 것은 별로 다르지 않을 거에요.”
‘소통의 철학’은 20세기 철학의 중심 과제이기도 했다. 20세기 전반 실존철학이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했다면, 20세기 후반 소통의 문제를 철학의 주요 과제로 삼은 것은 갈등조차 없이 무관심으로 단절된 현대인의 삶에 ‘관계’를 복원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소통의 메신저가 필요 없을 만큼 스스로 사회 속 타인들과 행복한 관계를 만들어 가고 있을까? 영산대 교수 anemoskim@yahoo.co.kr 삽화 출처: <행복한 왕자>(어린이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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