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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도화지의 속삭임 귀 기울여 봐요

등록 2005-06-26 19:02수정 2005-06-26 19:02

 미술치료 수업으로 아이들에게 한걸음 다가가려는 충남 천안 수신초등학교 이은숙 교사(맨 오른쪽)가 지난 15일 아이들 4명에게 눈을 감고 그림을 그리게 한 뒤 그림에서 무엇이 보이는지를 얘기하도록 하고 있다.
미술치료 수업으로 아이들에게 한걸음 다가가려는 충남 천안 수신초등학교 이은숙 교사(맨 오른쪽)가 지난 15일 아이들 4명에게 눈을 감고 그림을 그리게 한 뒤 그림에서 무엇이 보이는지를 얘기하도록 하고 있다.

③미술치료 선생님 모임 ‘마마걸’

충남 천안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40분쯤 달렸다. 모내기가 끝난 논에는 물오른 벼가 풍요로운 가을을 예고하고, 야트막한 산기슭에 자리한 마을들이 소담스럽다. 수신면 속창리에 있는 수신초등학교는 교장을 비롯한 교사 9명과 아이들 120명이 주인인 ‘작은 학교’다. 학년별로 한 학급씩, 학급당 20명 안팎의 아이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다.

지난 15일 오후 3시. 두 주일에 한 차례 돌아오는 자기계발 수업이 있는 날이다. 이 학교 이은숙(35) 교사의 ‘미술치료 수업’이 시작됐다. 4학년 유현정(11)·윤세원(11)양, 6학년 이은순(13)·장윤아(13)양. 이렇게 네 명이 1학년 교실에 모였다.

아이들은 먼저 ‘마음 일기장’을 펼쳤다. 도화지를 일곱 칸으로 나누고 자신의 느낌을 날마다 한 칸씩 그림으로 채워 나갔다. “화요일엔 우울했어요. 수요일엔 기분이 좋았고요. 일요일엔… 잘 모르겠어요.” 현정이의 설명은 간결했지만, 그림은 간단치가 않았다. 꽤 정성들여 그린 그림 속에는 빨강, 파랑, 주홍, 노랑색 선이 불규칙한 기하학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이걸 다 그리고 나니까요, 내가 이런 마음으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주 동안 자신의 감정 상태가 한눈에 보인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자 아이들은 눈을 감고 도화지에 멋대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고는 눈을 뜨고 자기 그림에서 무엇이 보이는지 찾기 시작했다. “물고기요!” “상어요!” “발가락이요!” 아이들은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찾아냈다. “신기하다, 아무 생각 안 하고 그렸는데….” “이게 왜 사탕이야? 난 숟가락처럼 보이는데?” 서로 그림을 바꿔 보던 세원이와 현정이가 같은 모양을 다르게 풀이했다. “자기 마음에 따라 그림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라는 이 교사의 설명을 듣고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그림들에는 정답이 없는 것이다.

마음껏 그려보라 하니
어린 가슴속 상처 꿈틀
크레용이 말문을 연다
아이들이 손을 내민다


이 교사는 은순이 그림 속에 사람을 매섭게 쏘아보는 ‘눈’이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은순아, 이 눈이 뭘 말하는 것 같아?” 은순이가 수줍게 웃었다. “잘 모르겠어요.” 은순이는 지난 번 수업 시간에 자기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를 그리면서, 어떤 사람과도 떨어져 홀로 있는 자신을 표현해 이 교사의 마음을 덜컥 내려앉게 한 아이다. 이 교사가 살짝 귓속말을 했다. “은순아, 선생님하고 나중에 얘기 나누자.”

이 교사가 미술치료 수업을 시작한 건 5년 전이다. 아이들의 마음을 읽는 데 그림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해 대학 사회교육원에서 관련 과목을 이수했고, 뜻이 맞는 인근 초등학교 교사들과 ‘마마걸(마음과 마음이 통할 걸)’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함께 연구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동안 주로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과 미술치료 수업을 해 왔으나, 올해는 자기계발 수업 과목으로 채택돼 전교생을 대상으로 수강 희망자를 모집했다.

“시골 학교 아이들은 들판을 뛰놀면서 밝고 건강하게 자랄 것 같죠?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부모가 하루 종일 일을 하니 우두커니 집에만 있는 아이들도 많고요, 특히 요즘엔 도시에서 살다 부모가 이혼하면서 조부모에게 맡겨져 여기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늘고 있어요. 아이들의 상처는 빨리 돌보지 않으면 곪지요. 송곳 같이 벼려진 감정이 어느 순간 자기 마음을 찌르면서 밖으로 표출되거든요.”

올해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성환(가명)이는 이 교사가 아이들의 그림을 단순히 ‘해석’하는 수준을 넘어 ‘치료’에 나서야겠다고 마음먹게 한 아이다. 나무를 그리라고 했더니 잎사귀 하나 없는 앙상한 나무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그림을 그렸던 성환이. 나무 옆에 전기톱을 들고 서 있는 사람도 성환이었고, 그 톱에 베인 채 피를 흘리고 있는 나무도 성환이었다.

“나중에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데 성환이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죠.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라고 울부짖는 성환이를 보면서 내가 교사로서 아무 힘이 없구나 하는 절망이 밀려왔어요.”

4년 전을 회고하는 이 교사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맺혔다. 그 일을 계기로 이 교사는 아이들이 스스로를 찌르는 송곳이 되기 전에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긍정하는 힘을 길러 주기로 결심했다. 일상적으로 ‘마음 일기’를 그리게 한다든지, 그림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는 등 적극적인 형태의 미술치료 수업에 나선 것도 그 때부터다.

“미술치료 전문가가 아니니까,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힘에 부친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냥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제일 중요하다고 스스로 변명하면서 수업을 합니다.”

그는 아이들의 마음을 다독이기가 쉽지 않고 상처를 치유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림을 그리며 조금씩 자신을 열어놓고 믿어주는 아이들이 있는 한 계속할 작정이라고 했다. 천안/글·사진 이미경 기자 friend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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