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제주중앙여자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영어라는 것을 배웠다. 그 영어 책에는 ‘그린’이라는 애벌레가 등장해서 우리를 영어 공부의 길로 안내하였다. 처음엔 흥미가 있었지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바람에 영어 시간은 나에게 고역이었다. 그 당시 어학원을 다니던 친구들은 ‘오버의 극치’를 보여주며 영어 노래와 율동을 따라하였고, 나 같은 애들은 오로지 짜증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 영어 테이프를 나눠 주시며, “여기서 나오는 역할극을 듣고 연습해 오세요”라며 숙제를 내셨다. 내 짝꿍은 의상과 소품을 준비하고 나는 테이프를 듣고 한글로 적어 가기로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테이프를 틀기 시작하였는데 순조롭게 진행되다가 갑자기 어느 한 단어가 들리지 않았다. ‘딜’, 분명 이 말로 시작하는 것 같았는데 결국 나는 그 단어를 ‘딜레이시우스’라고 적어서 학교에 갔다.
다음날, 한글로 써진 대본을 가지고 학교에 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학원파 애들의 지적을 받았다. “이거 뭐라고 쓴 거야? 이거 딜리셔스(delicious) 아냐?” 그 당시 ‘딜리’라는 발음을 엄청 혀를 꼬아서 말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사건 뒤 나는 영어와는 매우 튼튼한 벽, 돌로 된 벽을 쌓고 살았다.
그러다 1년이 지나 영어 학습지 공부를 시작하게 되고 영어로 쌓은 벽이 조금 허물어지나 싶더니만 1년 뒤 사건이 터졌다. 그러니까 6학년 때, 월드컵이 한창이던 6월, 우리 학교에서는 영어 경시대회에 내보낼 학생 1명을 뽑기 위해 예선전을 열었다. 반에서는 7명씩 예선전에 참가했는데 나 역시 거기에 끼게 되었다. 그렇게 5, 6학년 30명 정도의 학생이 예선전에 참가하였고 듣기(listening)로 실력을 겨루는 1차, 읽기(reading)로 겨루는 2차까지 합격하여 인터뷰(interview)인 3차에 도착한 학생은 단 4명. 진짜 실력이었는지, 얼떨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4명에 끼어 있었다. 인터뷰 장소에는 6학년 2명, 5학년 2명, 그리고 선생님.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을 시작했지만…. 우리 학교 대표는 5학년 어느 남자 아이가 되었다. 후배에게 졌다는 것과 대답 한번 제대로 못한 부끄러움에 한숨 쉬며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 모두 내 실력이 모자라 벌어진 일이지만 나는 그 5학년 꼬맹이를 미워했다. 집에 도착한 뒤에도 꼬맹이가 대회에서 떨어지길 바랐다. 하지만 그 애는 당당히 은상을 안고 돌아왔고 나는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6월 한달을 보냈다.
그러다 수소문 끝에 그 애가 다니는 학원을 알아내었다. 피(P) 어학원. 유명한 곳이었다. 나는 ‘영어 공부를 해야지’라는 마음보다 ‘그 꼬맹이를 이겨야지’라는 마음에 엄마를 설득하여 피(P) 어학원에 다니기로 했다.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 선생님들과 영어로만 대화하는 친구들. 적응하기에도 힘들었지만 몇 개월 다니다 보니 익숙해졌고 학교 영어 시간은 더 이상 나에게 고역이 아닌 즐거움이었다. 1년을 다닌 끝에 나는 그 꼬맹이보다 높은 반에서 수업하게 되었고, 나의 목표는 달성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4살, 토익(TOEIC)이라는 것을 풀어보고 난 뒤 내 목표는 영어 정복으로 움직여 갔다. 내 영어 실력이 아직 터무니없이 모자라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토익반에는 ‘신중’, ‘일중’, ‘제중’ 등 각 학교 학생들이 있었고, 내가 걷고 있었다면 그 애들은 날고 있었다. 다른 학원으로 옮긴 뒤 토익 900점대 아이들도 만나며 새로운 충격에 휩싸였다. 그저께 본 ‘한국인의영어능력검정(TEPS)’ 듣기에서 다른 애들은 눈 초롱초롱할 때, 꾸벅꾸벅 졸던 나였다.
이렇게 영어를 시작한 지 5년. 돌이켜 보니 너무 부끄럽고 창피할 따름이다. 난 뭘 한 걸까?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우여곡절 끝에 여기까지 왔지만 영어 정복을 위해선 더 많은 비바람, 눈보라를 맞아야 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영어가 이젠 실력이 아닌 기본이 되어 가고 있는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나의 영어 완전 정복 프로젝트는 계속될 것이다.
[평]
끝없는 영어의 경쟁 실패와 성취의 성장사
영어 공부에 자신의 자존심을 건 5년 동안의 성장사를 기록한 글이다. ‘영어가 이젠 실력이 아닌 기본’이 되는 사회에서 영어 공부의 중압감에 싸여 있는 우리 학생들의 단면을 볼 수 있는 글이다. 영어의 경쟁에서 드러나는 실패와 성취의 심정을 진솔하게 표현한 것, 그리고 뜻을 이루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태도가 돋보인다. 김규중/제주국어교사모임 회장, 제주중앙여중 교사 mukd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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