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교육

교실 밖에서 만난 아이들 활기 넘쳐

등록 2005-07-03 18:46수정 2005-07-03 18:46

요즘 점심을 먹고 나면 슬그머니 교실을 빠져 나오는 버릇이 생겼다. 2층 교무실에 들러 커피를 한 잔 뽑고, 서무실에 들러 우편물을 챙겨들고 학교 건물 뒷곁으로 간다. 그러고는 이팝나무 그늘에 앉는다.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기도 하고 차향을 맡으며 그냥 가만히 앉아 있기도 한다. 여기만 와도 학교의 온갖 소음에서 자유롭다. 그 조용함이, 그 한적함이 어느 순간부터 참 좋다. 거기서 우편물을 뜯어 읽기도 하고, 다음 시간 수업 준비를 하기도 한다. 이때가 어느새 참 귀한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이 조용하고 한적한 시간에 침입자가 생겼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우리 반 이림이, 민지, 지원이가 내 뒤를 밟아 따라 다닌다. 내가 그늘 아래 앉아 있으면 다가와서 인기척을 하고는 말을 붙이려다가 금방 가기도 하고, 5층 창문을 열고 “선생님!” 부르면서 거기 있다는 것 다 안다는 듯 아는 척하기도 한다. 언젠가는 쪼르르 와서는 “선생님 2층 교무실에 들렀다가 서무실에 들렀다가 건물 옆에 가셔서 책 읽지요? 다 알아요” 한다. 내가 움직이는 동선을 다 파악했다.

오늘도 그랬다. 교무실에서 나가려고 하니까 열려 있던 문이 스르르 바깥쪽에서 닫힌다. 문을 열고 나가 보니 아무도 없다. “이상하네” 하면서 지나가니 옆에 숨어 있던 녀석들이 훗훗 웃는다. 그럴 줄 알았다. 녀석들의 장난이다. 별로 개의치 않고, 건물 밖으로 나간 다음 늘 앉는 자리로 갔다. 책을 보고 있는데, 주목나무 옆 작은 덤불이 흔들린다. 거기 숨은 것이다. 들켰다면서 나오는데 셋이 다 약속이나 한 듯 나뭇가지를 귀에 꽂았다. 그러면서 민지가 지원이한테 뭘 하라고 시키는데 쑥스러운지 안 한다. 웃기려고 했던 모양이다. 내게 다가와서 내 머리 위에 그 나뭇가지들을 꽂고는 앞에 셋이 쪼르르 앉는다. 그러더니 배를 잡고 웃는다. 민지는 계속 깔깔 대고, 지원이는 눈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웃고, 이림이는 “뭐가 그렇게 웃긴데?” 하면서도 실실 웃고 있다. “선생님 사슴 뿔 같아요.” “카메라로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야 하는데…….” “우리 반에 그냥 꽂은 채로 들어가세요. 폭소 바다일 거예요” 하면서 수다다. 그때, 교감 선생님이 주차장으로 가다가 그 꼴을 보셨는데 황당해하며 허허 웃으신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떼어 내시지 왜 그냥 두셨어요?” 그러면서 오히려 걱정이다. 그렇게 앉아 있자니 어느새 시간은 가서 벌써 5교시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아이고, 오늘은 책도 별로 읽지 못했다.

그런데도 기분이 참 좋다. 이렇게 아이들과 평화롭게 웃으면서 지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답답한 교실 공간에서는 이만한 활기를 느낄 수 없는데, 밖으로 나오면 이렇게 생동감이 넘친다. 오늘은 교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세 아이의 다른 모습을 보았다. 그런 모습이 참 아름답다. 방학하기 전에 그동안 미루기만 했던 아이들과 하는 산책을 시작해야겠다. 김권호/서울 일신초등학교 교사 kimbechu@hanmail.net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