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복 교사의 시사쟁점! 이 한권의 책
[함께하는 교육]
[안광복 교사의 시사쟁점! 이 한권의 책]
<장폴 사르트르 - 시선과 타자> 변광배 지음 살림 24. 시선과 타자 -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쓸까? 장폴 사르트르는 ‘착한 어린이’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외할머니 집에서 사는 상황, 그는 주변에 사랑을 얻으려 애썼다. 구두를 신겨주고, 코에 약을 넣고, 옷에 솔질을 해주고 머리를 쓰다듬는 어른들의 모든 보살핌을 귀염성 있게 받아들였다. 신앙심 깊은 아이처럼 보이려고 오랫동안 교회 기도대에 앉아 있기도 했다. 사르트르는 이랬던 자신을 얌전한 어린아이처럼 구는 ‘놀이’를 했다고 떠올린다.
사르트르만 그럴까? 우리는 누구나 역할 놀이를 하며 살아간다. 선생님은 선생님처럼, 학생은 학생처럼, 경찰관은 경찰관처럼 보이려 노력한다. 삶의 성공은 인생에서 맡은 ‘배역’을 얼마나 잘 해내는지에 따라 갈리는 듯싶다. 화가 치솟아도 ‘어른’이라는 체면 때문에 참고, ‘학생답지 못하기에’ 교실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다.
하지만 우리가 역할에 충실하면 꼭 행복해지던가? 인정받는 순간이 지나면, 마음은 늘 불안하고 헛헛하다. 나는 과연 내가 바라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스스로에게도 이 물음에 답이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宣告)받았다.” 그의 말투에는 자유를 마치 ‘처벌’로 보는 듯한 느낌이 묻어난다. 하긴, 자유는 사람들을 버겁게 한다. 모든 게 정해져 있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겠다. “차라리 내가 바위였으면…” 하고 푸념하는 때는 더 그렇다. 바위는 그 자체로 바위다. 고민한들 바위라는 사실이 바뀔 리 없다. 그러나 인간은 ‘선택’을 해야 한다. 남들 하듯 살아갈지 세상과 주변에 맞설지 하는 선택이 우리에게는 끝없이 주어진다. 어느 쪽을 고르는가에 따라 나는 계속 달라진다. 죽는 순간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가슴앓이를 놓지 못하는 이유다.
세상의 모든 것은 ‘즉자적(卽自的) 존재’와 ‘대자적(對自的) 존재’로 나뉜다. 생각이 없는 것들은 즉자적 존재다. 바위, 나무, 짐승 등이 즉자적 존재에 들어가겠다. 이것들은 적어도 “왜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반면, 대자적 존재는 생각하는 인간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왜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스스로 밝혀야 한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은 그래서 중요하다. 인간이 아닌 모든 것에는 ‘본질’이 있다. 예컨대, 망치의 본질은 무엇을 때리고 박는 것이다. 김치의 본질은 맵고 짠 음식이다. 인간은 어떨까? 인간에게는 주어진 본질이 없다. 살아가면서, 즉 ‘실존’(實存)하면서 자신의 본질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늘 신산스럽다. 여차하면 스스로를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다른 사람의 존재는 아주 중요하다. 다른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가늠한다. 다른 이들의 평가는 내가 내 자신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까? 사르트르는 사람들 사이를 ‘제1의 관계’와 ‘제2의 관계’로 나눈다. 제1의 관계는 ‘사랑’이 핵심이다. 다른 이들을 나와 같이 자유를 가진 존재로 대하고 다가서려 한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실패로 끝나곤 한다. 상대가 나의 애정을 거절하면, 나는 상대방에게 다가설 수 없다. 상대가 나의 사랑을 받아준다면? 이때도 나의 마음은 헛헛하기만 하다. 상대가 나를 받아들이고 내 마음대로 움직일 때, 상대방의 자유는 스러져 버린다. 자신의 자유를 내던진 상대방은 바위나 나무와 다를 바 없다. 자유가 사라진 존재는 사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자유가 살아 있다면? 언제든 상대는 나를 버리고 떠날 수 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다. 제2의 관계는 상대방을 내 욕망에 무릎 꿇게 하려는 태도다. 그래서 힘과 권력으로 상대의 자유를 빼앗아 내 마음대로 움직이게끔 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의 자유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세게 억눌러도, 인간에게는 언제든 내게 맞설 자유가 솟아난다. 나아가, 겉으로는 나를 인정하고 좋아하는 척해도,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 방법이 없다. 생각은 말 그대로 자유인 탓이다. 그래서 다른 이와의 관계는 늘 부족하고 아쉬움을 남긴다. 사르트르는 “타자는 나의 지옥”이라고 말한다. 상대와 오롯하게 하나가 될 수도, 나 홀로 살아갈 수도 없다. 나의 가치는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고 ‘검증’받는 탓이다.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마음을 떼놓기가 힘들다. “인간은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존주의의 제1원리’다. <킹스 스피치>라는 영화가 인기다. 주인공은 말더듬이였던 영국의 조지 6세다. 조지 6세의 형, 에드워드 8세는 사랑을 위해 왕위를 버렸던 사람이다. 이혼녀와의 결혼을 막는 왕실의 법도에 맞서, 그는 왕 되기를 포기했다. 에드워드의 자유는 당당하다. 반면, 조지 6세는 자신에게 주어진 왕의 ‘역할’에 부담스러워한다. 그러면서도 뿌리치지 못한다. 그의 말더듬은 결국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과 기대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이었던 셈이다. “옛날의 왕들은 제복 입고 말에 앉아서 위엄만 보이면 됐지. 이제는 각 가정에 대고 비위를 맞추고 홍보도 해야 해. 왕족의 위치는 낮고 비천하게 축소됐어. 우리는 이제 배우야.” 영화 중에 나오는 조지 6세의 말이다. 어디 영국 왕만 그런가? 우리는 모두 다른 이들의 ‘눈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면서 우리는 나름의 인생을 만들어간다. ‘타인은 나의 지옥’이다. 그러나 나를 키우고 이끄는 인생의 열쇠이기도 하다. 선택은 우리에게 있다.
안광복 철학박사, 중동고 철학교사 timas@joongdong.org
<장폴 사르트르 - 시선과 타자> 변광배 지음 살림 24. 시선과 타자 -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쓸까? 장폴 사르트르는 ‘착한 어린이’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외할머니 집에서 사는 상황, 그는 주변에 사랑을 얻으려 애썼다. 구두를 신겨주고, 코에 약을 넣고, 옷에 솔질을 해주고 머리를 쓰다듬는 어른들의 모든 보살핌을 귀염성 있게 받아들였다. 신앙심 깊은 아이처럼 보이려고 오랫동안 교회 기도대에 앉아 있기도 했다. 사르트르는 이랬던 자신을 얌전한 어린아이처럼 구는 ‘놀이’를 했다고 떠올린다.
세상의 모든 것은 ‘즉자적(卽自的) 존재’와 ‘대자적(對自的) 존재’로 나뉜다. 생각이 없는 것들은 즉자적 존재다. 바위, 나무, 짐승 등이 즉자적 존재에 들어가겠다. 이것들은 적어도 “왜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반면, 대자적 존재는 생각하는 인간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왜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스스로 밝혀야 한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은 그래서 중요하다. 인간이 아닌 모든 것에는 ‘본질’이 있다. 예컨대, 망치의 본질은 무엇을 때리고 박는 것이다. 김치의 본질은 맵고 짠 음식이다. 인간은 어떨까? 인간에게는 주어진 본질이 없다. 살아가면서, 즉 ‘실존’(實存)하면서 자신의 본질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늘 신산스럽다. 여차하면 스스로를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다른 사람의 존재는 아주 중요하다. 다른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가늠한다. 다른 이들의 평가는 내가 내 자신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까? 사르트르는 사람들 사이를 ‘제1의 관계’와 ‘제2의 관계’로 나눈다. 제1의 관계는 ‘사랑’이 핵심이다. 다른 이들을 나와 같이 자유를 가진 존재로 대하고 다가서려 한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실패로 끝나곤 한다. 상대가 나의 애정을 거절하면, 나는 상대방에게 다가설 수 없다. 상대가 나의 사랑을 받아준다면? 이때도 나의 마음은 헛헛하기만 하다. 상대가 나를 받아들이고 내 마음대로 움직일 때, 상대방의 자유는 스러져 버린다. 자신의 자유를 내던진 상대방은 바위나 나무와 다를 바 없다. 자유가 사라진 존재는 사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자유가 살아 있다면? 언제든 상대는 나를 버리고 떠날 수 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다. 제2의 관계는 상대방을 내 욕망에 무릎 꿇게 하려는 태도다. 그래서 힘과 권력으로 상대의 자유를 빼앗아 내 마음대로 움직이게끔 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의 자유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세게 억눌러도, 인간에게는 언제든 내게 맞설 자유가 솟아난다. 나아가, 겉으로는 나를 인정하고 좋아하는 척해도,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 방법이 없다. 생각은 말 그대로 자유인 탓이다. 그래서 다른 이와의 관계는 늘 부족하고 아쉬움을 남긴다. 사르트르는 “타자는 나의 지옥”이라고 말한다. 상대와 오롯하게 하나가 될 수도, 나 홀로 살아갈 수도 없다. 나의 가치는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고 ‘검증’받는 탓이다.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마음을 떼놓기가 힘들다. “인간은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존주의의 제1원리’다. <킹스 스피치>라는 영화가 인기다. 주인공은 말더듬이였던 영국의 조지 6세다. 조지 6세의 형, 에드워드 8세는 사랑을 위해 왕위를 버렸던 사람이다. 이혼녀와의 결혼을 막는 왕실의 법도에 맞서, 그는 왕 되기를 포기했다. 에드워드의 자유는 당당하다. 반면, 조지 6세는 자신에게 주어진 왕의 ‘역할’에 부담스러워한다. 그러면서도 뿌리치지 못한다. 그의 말더듬은 결국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과 기대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이었던 셈이다. “옛날의 왕들은 제복 입고 말에 앉아서 위엄만 보이면 됐지. 이제는 각 가정에 대고 비위를 맞추고 홍보도 해야 해. 왕족의 위치는 낮고 비천하게 축소됐어. 우리는 이제 배우야.” 영화 중에 나오는 조지 6세의 말이다. 어디 영국 왕만 그런가? 우리는 모두 다른 이들의 ‘눈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면서 우리는 나름의 인생을 만들어간다. ‘타인은 나의 지옥’이다. 그러나 나를 키우고 이끄는 인생의 열쇠이기도 하다. 선택은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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