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복 교사의 시사쟁점! 이 한권의 책
난이도 수준 고2~고3
[안광복 교사의 시사쟁점! 이 한권의 책]
<공화주의> 김경희 지음/책세상
26. 공화주의 -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마라톤 전투는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그리스인들은 스스로 나서서 군대를 꾸렸다.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다. 반면, 페르시아의 군인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전쟁터로 끌려 나왔다. 그들은 노예와 다를 바 없었다. 승부는 양쪽의 마음가짐에서부터 갈렸다. 자유에 절절한 시민과 남을 위해 나선 노예의 대결, 당연히 승리는 그리스의 몫이었다.
마라톤 전투가 끝난 뒤, 민주주의는 그리스에서 확실하게 뿌리내렸다. 그리스 군대는 중장갑 보병(phalanx)이 중심이었다. 그들은 자기 돈으로 갑옷과 무기를 사서 기꺼이 전쟁터로 나간 시민들이었다.
공을 많이 세운 사람들은 목소리가 커지는 법이다. 시민들의 입김은 세졌다. 아테네에서는 더욱 그랬다. 잘났다며 떵떵거리던 치들은 언제 쫓겨날지 몰랐다. 시민들은 미운 사람 이름을 도자기 조각에 써서 냈다. 가장 많이 이름이 적힌 사람은 도시 바깥으로 쫓겨나야 했다. 이른바 ‘도편(陶片) 추방제’다. 힘세고 돈 많다고 거들먹거리다간 봉변당하기 일쑤였다.
정부의 자리들도 대부분 ‘제비뽑기’로 정해졌다. 그리스인들은 시민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여겼다. 모두가 똑같다면 선출보다 추첨이 더 민주적인 방법 아니겠는가. 게다가 임기도 짧게 했다. 많은 이들이 나라 일을 경험해보고 되도록 여럿이 권력을 누리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오래가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후, 아테네의 살림살이는 아주 좋아졌다. 먹고 살만해지자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어졌다. 배부르고 등 따스운데 뭐하러 골치 아픈 나랏일에 신경 쓰겠는가. 한편, 어떤 이들은 재산을 더 불리는 데 매달렸다. ‘경제’가 중심이 되면 정의나 평등 같은 가치는 구석으로 내몰린다. 탐욕이 양심을 눌러버리는 탓이다.
아테네는 제각각 자기 욕심만 좇는 사회가 되었다. 정치는 온갖 이권에 따라 춤을 췄다. 그리스 안의 다른 사회들도 별다르지 않았다. 펠레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의 자살’이라고도 불린다. 그리스 안의 여러 나라들은 이익을 놓고 편을 갈라 치열하게 오래도록 싸웠다. 그 결과, 모두가 자잘하고 별 볼 일 없는 처지로 떨어져 버렸다. 이익만 좇는 개인, 경제만 앞세우는 국가가 맞을 만한 결말이다.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 나라가 꼭 ‘국민을 위한’(for the people) 나라는 아니다. 투표 같은 민주적 절차를 갖추었다 해도, 사회가 삐딱해지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역사에서도 국민투표로 독재자의 손을 들어준 경우는 드물지 않다.
진정 ‘국민을 위한’ 나라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화주의’는 이 물음에 답을 준다. 공화주의는 권력이 왕이나 귀족 같은 몇몇에만 있지 않고 모든 시민들에게 있다고 외친다. 또한, 공화주의는 시민들이 자신의 이익에 앞서 ‘공’(公)을 생각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키케로는 자신의 조국인 로마를 ‘공화국’(res publica)이라 불렀다. 그는 자신의 책 <국가>에서 힘주어 말한다. “공화국은 시민들의 나라다. 시민은 아무렇게나 모인 사람들을 뜻하지 않는다. 공화국은 정의와 공동의 이익을 인정하고 동의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반면,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을 주장한다. 제각각 자신의 이익을 좇다 보면 모두가 잘살게 된다는 논리다. 이득을 많이 보기 위해서는 합리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시민들이 이렇게 움직이다 보면 사회도 합리와 정의가 지배하는 곳으로 바뀔 테다.
그러나 공화주의자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의 이익만 좇아서는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한다. 전체를 위해 욕심을 스스로 누를 줄 아는 ‘시민적 덕성’(civic virtue)이 살아있어야 한다.
로마에서는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커도 존경을 받지 못했다. 부러움을 살 수는 있어도 명예는 얻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아쉬울 것 없는 사람들도 공적인 일에 앞장서서 나섰다. 법에 의한 지배도 중요하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의 고소·고발 같은 제도를 부러워했다. 마키아벨리의 조국인 피렌체에서는 갈등이 주먹다짐 같은 폭력으로 해결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힘세고 돈 많은 이들만 이로움을 얻는다. 제대로 된 법은 모두를 위한 이익, 공공선(公共善)을 찾아주는 것이어야 한다.
공화주의는 이처럼, 시민적 덕성과 참여, 그리고 법에 의한 지배와 공공선이 살아있는 사회를 꿈꾼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헌법은 1장 1조 1항에서부터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이며 공화국임을 분명히 한다. 이제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정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선거 등을 통해 비교적 투명하게 이루어진다. 하지만 과연 대한민국은 ‘공화국’일까? 모든 시민이 주인인, 누구도 차별과 서러움을 받지 않는 나라일까?
이 물음에 고개를 선뜻 끄덕이기는 쉽지 않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에서는 장기근속자 자녀를 우선 채용하자는 단체협약안을 내놓았단다. 대의원회의의 토론과 투표를 거친 ‘민주적’인 의견이다. 그러나 ‘민주적인 절차를 밟은 의견’을 바라보는 마음은 편치 않다.
현대자동차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이다. 게다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대한민국을 평등한 복지국가로 만드는 데 적잖은 기여를 해왔다. 이렇듯 대표적인 기업과 단체가 자기 식구부터 먼저 챙기는 모습은 대한민국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아테네는 민주적인 사회였다. 시민들은 자신의 이익을 자유롭게 좇았다. 정치는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탐욕을 선택했다. 이들의 영광은 짧고 가늘게 끝났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 우리나라는 아테네와 얼마나 다를까? 민주주의 뒤에 가려진 ‘공화국’의 꿈이 새삼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시사브리핑: 현대차노조 ‘정규직 특혜’ 단협안 확정 2011년 4월20일, 현대자동차노동조합은 회사 쪽에 직원 신규 채용 때 장기근속자 자녀에 대한 우대를 요구하는 단체협약안을 확정했다. 여기에는, “회사는 인력 수급 계획에 의거, 신규 채용 시 정년퇴직자 및 25년 이상 장기근속자의 자녀에 대해 채용 규정상 적합한 경우 우선 채용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대해 대의원들 사이에서조차 ‘정규직 세습’이라는 비판이 이는 등 논란이 커지고 있다.
안광복 철학박사, 중동고 철학교사 timas@joongdong.org
<공화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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