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E. H. 카/김택현 옮김/까치
[통합논술 세미나]
<역사란 무엇인가> 1. 과거 사실과 역사적 사실
2. 역사와 위대한 인물, 3. 과학적 역사 vs 문학적 역사, 4. 역사와 진보, 그리고 미래
다음책: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역사란 무엇인가> 1. 과거 사실과 역사적 사실
2. 역사와 위대한 인물, 3. 과학적 역사 vs 문학적 역사, 4. 역사와 진보, 그리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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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역사란 무엇인가>는 1961년 출판되자마자 역사학도뿐만 아니라 현대 지식인의 필독서가 됐다. 저자 에드워드 핼릿 카는 1961년부터 20년간 영국 외무부 공무원으로 근무했으며, 이후 <더 타임스> 부편집인, 옥스퍼드대학 정치학 교수를 지내는 등 이력이 다양하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랑케의 실증주의 사관을 비판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말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마지막에 있다. 카는 “역사는 점진적인 개선을 추구한 사람들이 아닌 기존 질서에 근본적인 도전을 감행했던 사람들에 의해 진보했다”고 썼다. 카는 책 곳곳에 카를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했고 공감을 표했다. 이 때문에 <역사란 무엇인가>는 군사독재 시절 한국에서는 금서로 묶이기도 했다.
[풀무질]
기원전 49년 1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1개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 루비콘 강에 도착했다. 당시 로마법에 따르면 개선장군을 뺀 그 누구도 무장 병력을 거느리고 루비콘을 건널 수 없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홀몸으로 로마에 들어갔다간 반대파의 손에 제거될 게 분명했다.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남기고 도강했고 정적들을 제압했다. 카이사르는 독재관 자리에 올랐다가 기원전 44년 공화파에게 암살당했다. 로마에선 내전이 벌어졌으나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최종 승리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로 불리면서 황제가 됐고, 공화정이었던 로마는 전제군주정으로 바뀌었다.
카이사르 이전과 이후에 셀 수 없이 많은 인물이 루비콘 강을 통과했다. 카이사르 자신도 여러 번 건넜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는 오직 ‘기원전 49년 1월의 그 사건’만 기억한다. 그 사건만 역사를 바꿨기 때문이다. 과거의 사실이라고 무조건 역사적 사실이 되는 건 아니다. 역사가에 의해 의미가 있다고 ‘해석된’ 사건만 역사적 사실이 된다.
1830년대 레오폴트 폰 랑케(1795~1886)는 역사가의 임무는 단지 ‘그것은 실제로 어떠했는가’ 보여주는 것이라고 선언했고, 이 말은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흔히 사실은 스스로 이야기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수많은 루비콘 도강 가운데 오직 카이사르의 행위만 기억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사실은 역사가가 허락할 때에만 이야기한다.
역사가가 과거의 사실을 정확하게 아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가의 정확성은 의무이지 미덕은 아니다. 어떤 역사가를 정확하다는 이유로 칭찬하는 건 잘 말린 목재나 적절하게 혼합된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집을 짓는다는 이유로 어떤 건축가를 칭찬하는 것과 같다.
역사 기록은 오염되어 있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의 외무장관이었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1878~1929)은 죽을 때 300상자 분량의 문서를 남겼다. 그의 비서 베른하르트는 이를 간추려 권당 600여 쪽의 3권짜리 <슈트레제만의 유산>이라는 책을 펴냈다. 슈트레제만은 미국·영국·프랑스 등을 상대로 한 서방정책은 큰 성공을 거뒀으나 소련을 상대로 한 동방정책은 별 성과가 없었다. 따라서 베른하르트가 펴낸 책에서 서방정책은 지나치게 큰 비중을 차지했다. 실제 슈트레제만은 동방정책에 훨씬 더 정성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1935년 영국의 한 출판업자가 베른하르트 선집을 3분의 1이나 줄인 축약본을 펴냈다. 베른하르트의 선집에 불충분하게 반영됐던 동방정책은 시야에서 훨씬 더 멀어졌고, 소련은 슈트레제만의 서방 중심적 외교정책에 이따금씩 끼어드는 달갑지 않은 침입자가 됐다.
1945년 독일이 연합군의 맹폭격을 당하고 있을 때 300상자 분량의 원본 문서가 사라졌다면? 만약 베른하르트의 선집도 없어졌다면? 영문 축약본이 정본이 되고 슈트레제만 외교정책의 진실은 영원히 묻혔을 것이다.
문제는 더 있다. 슈트레제만 원본 문서에는 베를린에서 소련 대사와 벌인 수백 차례 회담 기록, 소비에트 외교관 치체린(1872~1936)과의 20여 차례 회담 기록이 들어 있다. 문서에 슈트레제만의 주장은 언제나 적절하고 설득력이 있지만 상대방 주장은 빈약하고 혼란스러운 것으로 나타난다.
이 문서들은 무엇이 일어났는지 그대로 말해주지 않는다. 슈트레제만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것, 그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해주기를 원했던 것, 무엇인가가 일어났다고 그 자신이 생각하고 싶어 한 것만 말해줄 뿐이다. 선별 과정을 시작한 것은 슈트레제만 자신이었다. 원 사료자체가 오염되어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에 관한 우리의 그림에 결함이 있는 건 아테네시의 소수집단에 의해서 그려졌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인이나 노예 또는 스파르타·테베·코린트인이 고대 그리스를 어떻게 봤는지 알 수 없다. 서양 중세인들은 모두 종교에 깊이 빠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종교인들로 기독교와 관련된 건 무엇이든 적었지만 그 이외의 많은 것은 빠뜨렸다.
역사는 결국 ‘해석된 역사’다
이탈리아의 역사가·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1866~1952)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선언했는데, 이는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해서 그리고 현재의 문제들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주요한 임무는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임을 뜻한다. 만일 역사가가 평가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는 무엇이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코 ‘순수한 것’으로 다가서지 않는다. 사실들을 연구하기 전에 (그 사실을 기록한) 역사가를 연구하라. 역사는 해석을 의미한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며 사실은 과거에 속한다. 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다. 자신의 사실을 가지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쓸모없는 존재다. 자신의 역사가를 가지지 못한 사실은 죽은 것이며 무의미하다.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마치질] 랑케 “사실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
에드워드 핼릿 카와 자주 대비되는 인물이 독일의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사진)다. <역사란 무엇인가>도 기본적으로 랑케의 사관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개신교 목사 집안에서 태어난 랑케는 1824년 출판한 <라틴 및 게르만 제 민족의 역사 1494~1514>로 세계적인 역사학자가 됐다. 그는 이 책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까지 역사에는 과거를 판단하거나 윤택한 미래를 위해 교훈을 제공해 주는 기능이 있었다. 이 책은 고상한 과업을 달성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그것이 진실로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려고 할 뿐이다.”
랑케는 과거 사실 그 자체를 ‘역사가의 마음 밖에 존재하는 실재’로 생각했다. 따라서 역사가는 수많은 자료를 찾아, 과거를 존재했던 그대로 밝히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나는 나의 자아를 소거해서 다만 사실로 하여금 말하게 하며 강대한 모든 힘을 눈앞에 나타나게 하려고 할 뿐이다.”
자아를 소거하자. 그러면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과거 사실이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과거 사실을 연구하는 역사가는 사심을 버리고 진실해야 하며, 자신의 입장이나 기질 혹은 기호 때문에 사실을 왜곡하지 말아야 하고, 정확하고 공정해야 한다.
과거 사실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고 있고, 가져야만 한다. 따라서 과거 사실은 철학에 종속될 수 없다. 특히 랑케는 정반합의 긍정과 부정을 통해 인류 역사를 해석했던 헤겔을 누구보다도 비판했다.
과거 사실의 객관성과 독립성이란 정치로부터 과거 사실의 독립이요, 신학으로부터 과거 사실의 독립이요, 철학으로부터 과거 사실의 독립이다. 이는 역사학의 독립을 의미한다. 과거 사실 그 자체를 위한 학문, 역사를 위한 역사학, 바로 그것이 진정한 역사학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랑케를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랑케에 대해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사실은 역사가가 허락할 때만 이야기한다”, “사실이란 마대와 같아서 그 안에 무엇인가를 넣을 때까지는 서 있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카의 주장은 좀더 나아가면 ‘사실이란 과연 무엇인가’란 철학적 문제와 연관된다. 사실은 우리의 인식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설사 사실이 인간의 인식 밖에 존재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발견해서 인식하기 전에는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가는 인식론의 근본 문제다.
자연과학의 대상은 사실인지 아닌지 검증할 수 있지만 경제·사회·문화 분야에서는 사실 여부를 검증하기 힘들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단 한 권의 책도 남기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소크라테스의 주장이라고 전해지는 내용 대부분은 플라톤의 책에 실려 있다. 즉 플라톤이 보고 듣고 해석한 소크라테스의 말일 뿐 그게 바로 소크라테스가 진짜 말했던 건지 정확하게 확인하기는 힘들다.
[담금질] 동북공정은 현재와 과거의 대화?
중국은 2001년 동북공정을 시작했다. 동북공정의 핵심은 현재 중국 영토 안에서 벌어진 과거의 역사는 모두 중국사라는 것이다. 동북지방이 중국의 영토로 완벽하게 들어온 시점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1644년 중원을 장악한 뒤부터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면서 만주는 중국 영토가 됐다. 청나라 이전 만주는 한족(漢族)의 힘이 강할 때는 중국 영토로 들어갔다가 고구려·선비족·몽골족·만주족 등이 흥기하면 이민족의 땅이 되는 등 변화가 많았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중국은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벌였다. 중국은 5000년 문화대국으로 자부해왔지만 공식 역사기록으로 알 수 있는 연대는 기원전 841년이 가장 이르다. 더구나 하나라는 실제로 존재했는지 신화에 불과한지 여전히 논란중이었다. 그러나 ‘하상주단대공정’으로 하나라는 기원전 2070년 무렵, 상나라는 기원전 1600년 무렵에 시작한 것으로 결정됐다. 상나라의 반경이 허난(하남)성 은허로 천도한 때는 기원전 1300년 무렵,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때는 기원전 1046년으로 확정했다. ‘하상주단대공정’은 한마디로 ‘신화를 역사로 만들기’였다. 동북공정이나 하상주단대공정은 모두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어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데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말,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다’는 동북공정과 하상주단대공정을 합리화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에 따르면 역사적 사실은 스스로 말을 할 수 없다. 역사가의 해석을 거쳐야 한다. 한데 과거의 사실을 해석하는 역사가는 현재에 살고 있고, 현재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 현재적 관점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역사는 해석된 역사”라는 게 카의 기본 관점이다. 고구려사와 관련해 한국 학자와 중국 학자의 해석이 다르다. 한국 학자는 한국사라고, 중국학자는 중국사라고 해석한다. 양쪽의 해석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카는 “역사는 교훈을 준다”고 말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한 기본 이유는 역사적 교훈과 관련이 있다. 중국의 한족은 이민족의 침입을 많이 받았다. 위진 남북조 시대에는 북방 유목민족, 원나라 때는 몽골족, 청나라 때는 만주족의 지배를 받았다. 당나라 때도 티베트족의 압박을 받았고, 기원전 8세기 서주가 망한 것도 서쪽 유목민족인 견융의 침입 때문이었다. 1992년 한-중 수교 뒤 많은 한국인들이 백두산에 올라 “만주 땅을 다시 찾자”는 말을 공개적으로 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벌인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나중에 통일 한국이 만주 영유권을 주장할 것에 대비해, 만주가 언제나 중국의 영토였다는 역사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카는 결코 과거 사실의 객관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산이 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고 산의 원래 모습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라고 비유했다. 그러나 완벽한 객관성을 요구한 랑케의 주장에 비해 상당히 애매하다.
[벼리기] 아래 논제를 읽고 글을 쓴 뒤, <아하! 한겨레> 누리집(www.ahahan.co.kr)에 올려 주세요. 잘 쓴 글을 선택해 ‘통합논술 세미나’에 실어 줍니다. 1. 아래의 인용문을 읽고 무슨 뜻인지 설명해 보시오. (400자) (1) 배러클러프(1908~1984, 영국의 역사가) 교수 자신도 중세사 연구자로서 소양을 쌓은 사람이지만, 그는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비록 사실에 기초하고는 있다고 해도, 엄격히 말하면 결코 사실 그것이 아니라 널리 승인된 일련의 판단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 <역사란 무엇인가> 1장 (2)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보르헤스가 쓴 어떤 단편소설(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주인공, 즉 자신이 보거나 듣거나 경험한 것은 무엇이든 절대로 잊지 않았지만 ‘내 기억 속에 있는 것은 쓰레기더미’라고 자백한 그 주인공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차이를 잊어버리는 것, 일반화시키는 것, 추상화시키는 것’이므로 푸네스에게는 ‘그다지 생각할 능력이 없었다’ …카는 루카치(헝가리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가 경험주의적 역사가들의 수호신인 랑케를 사건, 사회, 제도들의 수집품은 보여줬지만 그것들이 바뀌면서 발전하는 과정은 보여주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반역사적인 인물로 간주했음을 지적한다. 그렇게 되면 ‘역사는 이색적인 일화들을 수집해놓은 것이 된다’고 루카치는 말했다. - <역사란 무엇인가> ‘2판을 위한 노트’ 2. 아래 시를 읽고, 에드워드 핼릿 카가 주장한 역사 해석의 관점에서 분석하시오. (600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꽃> 김춘수 3.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는 역사책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 자신의 생각을 써 보시오. (1000자) 김태경 <아하! 한겨레> 편집장, ‘한겨레글쓰기연구소’ 연구위원
에드워드 핼릿 카
[마치질] 랑케 “사실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
[담금질] 동북공정은 현재와 과거의 대화?
중국은 2001년 동북공정을 시작했다. 동북공정의 핵심은 현재 중국 영토 안에서 벌어진 과거의 역사는 모두 중국사라는 것이다. 동북지방이 중국의 영토로 완벽하게 들어온 시점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1644년 중원을 장악한 뒤부터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면서 만주는 중국 영토가 됐다. 청나라 이전 만주는 한족(漢族)의 힘이 강할 때는 중국 영토로 들어갔다가 고구려·선비족·몽골족·만주족 등이 흥기하면 이민족의 땅이 되는 등 변화가 많았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중국은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벌였다. 중국은 5000년 문화대국으로 자부해왔지만 공식 역사기록으로 알 수 있는 연대는 기원전 841년이 가장 이르다. 더구나 하나라는 실제로 존재했는지 신화에 불과한지 여전히 논란중이었다. 그러나 ‘하상주단대공정’으로 하나라는 기원전 2070년 무렵, 상나라는 기원전 1600년 무렵에 시작한 것으로 결정됐다. 상나라의 반경이 허난(하남)성 은허로 천도한 때는 기원전 1300년 무렵,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때는 기원전 1046년으로 확정했다. ‘하상주단대공정’은 한마디로 ‘신화를 역사로 만들기’였다. 동북공정이나 하상주단대공정은 모두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어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데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말,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다’는 동북공정과 하상주단대공정을 합리화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에 따르면 역사적 사실은 스스로 말을 할 수 없다. 역사가의 해석을 거쳐야 한다. 한데 과거의 사실을 해석하는 역사가는 현재에 살고 있고, 현재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 현재적 관점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역사는 해석된 역사”라는 게 카의 기본 관점이다. 고구려사와 관련해 한국 학자와 중국 학자의 해석이 다르다. 한국 학자는 한국사라고, 중국학자는 중국사라고 해석한다. 양쪽의 해석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카는 “역사는 교훈을 준다”고 말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한 기본 이유는 역사적 교훈과 관련이 있다. 중국의 한족은 이민족의 침입을 많이 받았다. 위진 남북조 시대에는 북방 유목민족, 원나라 때는 몽골족, 청나라 때는 만주족의 지배를 받았다. 당나라 때도 티베트족의 압박을 받았고, 기원전 8세기 서주가 망한 것도 서쪽 유목민족인 견융의 침입 때문이었다. 1992년 한-중 수교 뒤 많은 한국인들이 백두산에 올라 “만주 땅을 다시 찾자”는 말을 공개적으로 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벌인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나중에 통일 한국이 만주 영유권을 주장할 것에 대비해, 만주가 언제나 중국의 영토였다는 역사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카는 결코 과거 사실의 객관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산이 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고 산의 원래 모습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라고 비유했다. 그러나 완벽한 객관성을 요구한 랑케의 주장에 비해 상당히 애매하다.
[벼리기] 아래 논제를 읽고 글을 쓴 뒤, <아하! 한겨레> 누리집(www.ahahan.co.kr)에 올려 주세요. 잘 쓴 글을 선택해 ‘통합논술 세미나’에 실어 줍니다. 1. 아래의 인용문을 읽고 무슨 뜻인지 설명해 보시오. (400자) (1) 배러클러프(1908~1984, 영국의 역사가) 교수 자신도 중세사 연구자로서 소양을 쌓은 사람이지만, 그는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비록 사실에 기초하고는 있다고 해도, 엄격히 말하면 결코 사실 그것이 아니라 널리 승인된 일련의 판단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 <역사란 무엇인가> 1장 (2)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보르헤스가 쓴 어떤 단편소설(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주인공, 즉 자신이 보거나 듣거나 경험한 것은 무엇이든 절대로 잊지 않았지만 ‘내 기억 속에 있는 것은 쓰레기더미’라고 자백한 그 주인공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차이를 잊어버리는 것, 일반화시키는 것, 추상화시키는 것’이므로 푸네스에게는 ‘그다지 생각할 능력이 없었다’ …카는 루카치(헝가리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가 경험주의적 역사가들의 수호신인 랑케를 사건, 사회, 제도들의 수집품은 보여줬지만 그것들이 바뀌면서 발전하는 과정은 보여주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반역사적인 인물로 간주했음을 지적한다. 그렇게 되면 ‘역사는 이색적인 일화들을 수집해놓은 것이 된다’고 루카치는 말했다. - <역사란 무엇인가> ‘2판을 위한 노트’ 2. 아래 시를 읽고, 에드워드 핼릿 카가 주장한 역사 해석의 관점에서 분석하시오. (600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꽃> 김춘수 3.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는 역사책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 자신의 생각을 써 보시오. (1000자) 김태경 <아하! 한겨레> 편집장, ‘한겨레글쓰기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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