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함께하는 교육] 역사란 무엇인가- 3. 과학적 역사 vs 문화적 역사
■ 책소개
<역사란 무엇인가> E. H. 카/김택현 옮김/까치
<역사란 무엇인가>는 1961년 출판되자마자 역사학도뿐만 아니라 현대 지식인의 필독서가 됐다. 저자 에드워드 핼릿 카는 1961년부터 20년간 영국 외무부 공무원으로 근무했으며, 이후 <더 타임스> 부편집인, 옥스퍼드대학 정치학 교수를 지내는 등 이력이 다양하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랑케의 실증주의 사관을 비판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말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마지막에 있다. 카는 “역사는 점진적인 개선을 추구한 사람들이 아닌 기존 질서에 근본적인 도전을 감행했던 사람들에 의해 진보했다”고 썼다. 카는 책 곳곳에 카를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했고 공감을 표했다. 이 때문에 <역사란 무엇인가>는 군사독재 시절 한국에서는 금서로 묶이기도 했다.
■ 풀무질 과음하고 파티에서 돌아오던 존스는 컴컴한 길모퉁이에서, 나중에 브레이크에 결함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 차로 로빈슨을 치어 죽였다. 로빈슨은 마침 그 길모퉁이에 있던 가게에서 담배를 사려고 길을 건너던 중이었다.
사람들은 사고 원인을 존스가 과음한 탓 또는 1주일 전 그 차를 정밀 수리한 정비소의 잘못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유명인사’가 “만일 담뱃갑에 담배만 있었던들 로빈슨은 그 길을 건너지 않았을 것”이라며 “로빈슨의 흡연 욕구가 죽음의 원인”이라고 여러분을 설득한다면? 에드워드 핼릿 카는 ‘어느 유명인사’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앞뒤 내용으로 볼 때 저명한 과학철학자 카를 포퍼(1902~1994)가 분명하다. 포퍼는 헤겔·마르크스와 같은 역사주의자는 “인간 행위를 (인간 의지로부터 독립된) 인과관계로 설명함으로써 인간 자유의지를 부정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역사의 인과관계를 부정하고 우연의 구실을 강조하는 건 로빈슨이 애연가였기 때문에 죽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가는 ‘합리적 원인’과 ‘우연적인 원인’을 구분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역사를 바꾸지 않았다
그럼에도 역사에서 우연의 구실을 강조하는 견해는 여전히 유행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만 낮았어도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말은, 고대 로마의 패권을 놓고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했던 안토니우스가 그녀의 아름다움에 얼이 빠진 게 악티움 해전 패전의 원인이었다고 본다. 카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역사에서 운이나 우연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론들은 역사적 사건의 봉우리가 아니라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집단이나 민족에게서 우세하다. 시험성적이란 모두 운수 나름이라는 생각은 열등반에 배치될 사람들 사이에 언제나 유행하게 마련이다.”
역사의 연구는 원인에 관한 연구이다. 역사가는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역사가는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자료를 보고 혼잡한 사건과 혼잡한 특수한 원인들에 일정한 질서와 통일을 부여한다. 이를 흔히 결정론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의미다.
“모든 사건에는 하나 또는 여러 가지의 원인이 있고 그 하나 또는 여러 가지의 원인들 중에서 무엇인가 달라진 것이 없었다면 그 사건은 다른 식으로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신념이다.”
원인도 없이 행동하며 따라서 그 행동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 인간이란, 사회의 밖에 존재하는 개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추상이다. ‘인간사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포퍼 교수의 주장은 의미가 없거나 거짓이다.
역사가 과학일 수 없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역사는 특수한 것만을 다루며, 과학은 일반적인 것을 다룬다.
→ 역사가는 언어의 사용 그 자체에 의해서 과학자들처럼 일반화에 관여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은 매우 달랐고 특수한 것이었지만, 역사가는 양쪽 모두를 전쟁이라고 부른다. 역사가의 진정한 관심은 특수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안에 있는 일반적인 것에 있다.
역사가를 역사적 사실의 수집가와 구별해주는 것은 일반화다. 자연과학자를 박물학자나 표본수집가와 구별해주는 것 역시 일반화다.
(2) 역사는 교훈을 가르치지 않는다.
→ 일반화의 진정한 핵심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역사로부터 가르침을 얻고자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을 일으켰던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과 1848년의 혁명들, 1871년의 파리 코뮌의 교훈에 깊게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이다.
역사는 문학이 아니라 과학이다
(3) 역사는 예견할 수 없다.
→ 중력의 법칙은 특정한 저 사과가 반드시 땅에 떨어질 것임을 보증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그 사과를 따서 광주리에 넣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중력 법칙이 타당성이 없는가? 마찬가지로 역사가는 어느 특정 나라에서 몇 월에 혁명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하지 않는다. 단, 이러저러한 사회적 조건이 갖춰진다면 가까운 장래에 혁명이 발생한 것 같은 그런 상태에 있다는 식의 결론을 내린다. 사회과학자·역사가·자연과학자의 목표와 방법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4) 역사는 인간이 인간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다.
→ “사회과학에서는 경험을 포괄하고 수집하고 정리하는 범주마저도 관찰자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독일의 사회학자 카를 만하힘(1893~1947)은 말했다. 현대물리학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르면, 공간상의 거리와 시간의 흐름을 재는 척도가 관찰자의 움직임에 좌우된다. 역사도 비슷하다.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역사가 거의 반복되지 않는 하나의 이유는 두 번째 공연의 등장인물들은 첫 번째 공연의 결말을 알고 있어 그에 관한 지식이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이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에게서 끝장났다는 것을 잘 알았던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혁명도 똑같이 끝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지도자들 가운데 나폴레옹을 가장 닮은 트로츠키를 불신했고, 나폴레옹을 가장 닮지 않은 스탈린을 신뢰했던 것이다.
사회과학은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이고, 검사자이면서 동시에 검사대상인 인간과 관계하므로, 주체와 객체의 엄격한 분리를 선언하는 어떤 인식론과도 양립할 수 없다.
■ 마치질 “역사책은 기표들의 가장무도회” 20세기에 들어 등장한 기호언어학은 역사학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 기호언어학에 따르면 ‘언어란 생각들을 표현하는 기호체계’인데, 기호는 기표(記標·시니피앙)와 기의(記意·시니피에)로 이뤄진다. 예를 들어 ‘개’라는 물리적 형태의 글자는 ‘ㄱ+ㅐ’의 결합이다. 이 글자는 ‘네 발이 달리고 털과 꼬리가 있으며, 사람을 잘 따라 예로부터 가축으로 기르는 동물’을 의미한다. ‘ㄱ+ㅐ’가 결합해 이뤄진 ‘개’라는 물리적 형태(글자)를 기표라 하고, ‘ㄱ+ㅐ’가 가리키는 ‘네 발이 달리고~’가 기의다. 한데 ‘네 발이 달리고~’라는 기의가 왜 한국어로 ‘개’라는 기표와 결합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똑같은 짐승을 영어로는 dog라고 하고 중국어로는 취안(犬)이라고 기표한다.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자의적이다. 갑돌이가 기르는 ‘개’와 길동이가 기르는 ‘개’는 품종도 모양도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뭉뚱그려 ‘개’ 라고 부른다. 기표는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실재 그 자체를 표상하는 게 아니라, 그 개별적인 실재를 포함하는 부분 유사성만 드러낸다. 여기서도 역시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기표(지시어)는 기의(지시 대상)를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왜곡한다. 즉 언어는 총체적 존재로서의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어떤 양상만을 추상화·일반화하거나 또는 일정한 특성을 부여함으로써 실재를 왜곡한다. 역사책은 언어로 쓴다. 한데 기표와 기의로 구성된 언어가 이렇게 자의적이라면 역사책은 과연 사실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을까?
광개토대왕비(사진)에는 고구려 건국 시조인 추모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옛날 시조 추모왕이 고구려의 기초를 창건했다. 추모왕은 북부여 출신으로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날 때부터 성덕이 있었으며….”
한데 추모왕은 인간이므로 ‘천제의 아들’일 수 없다. 광개토대왕비문 내용은 장수왕 시대의 고구려인들이 시조에게 신성성을 부여해 자신의 나라가 하늘의 뜻에 따라 세워졌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언어학적으로 표현하면, ‘고구려 건국’이라는 기표와 건국의 내용인 ‘기의’는 들어맞지 않는다.
프랑스의 롤랑 바르트(1915~1980)는 과거의 실재를 재구성한다는 역사가들의 주장을 일종의 허구로 파악했다. 그는 역사책을 ‘가장무도회에 참가한 기표들의 행렬’일 뿐이라고 말했다. 사실의 객관성이란 착각일 뿐이다. 언어학이 역사학에 도입되면서 이제 ‘과거에 대한 사실’은 더이상 과거 사실(실재)과 동일시할 수 없게 됐다. 더 나아가 사료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일 수는 있어도 더이상 사실을 담고 있는 문서로서의 자료는 아니다.
■ 담금질 단군 신화, 다른 2가지 해석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단군 신화를 청동기 시대에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 <국사> 교과서는 “신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국사> 교과서에 따르면, 환웅 부족은 태백산의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뤘고, 이들은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자기 부족의 우월성을 과시했다. 사유재산의 성립과 계급 분화에 따라 지배 계급은 농사와 형벌 등 사회생활을 주도했다. 신석기 시대 말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발전하는 시기에 계급의 분화와 함께 지배자가 등장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 질서가 성립됐다. 새 지배층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홍익인간)는 통치 이념을 내세웠다.
환웅 부족은 주위의 다른 부족을 통합하고 지배해 갔다. 곰을 숭배하는 부족은 환웅 부족과 연합해 고조선을 형성했으나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은 연합에서 배제됐다. 단군은 제정일치의 지배자였다.
그러나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박노자 교수는 단군 신화를 다르게 해석한다. 그는 <거꾸로 보는 고대사>에서 기원전 2333년에 건국했다는 고조선의 단군 이야기가 3500년이나 지난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야 일연(1206~1289)의 <삼국유사>에 실린 것에 주목한다.
박노자는 단군신화가 고조선의 건국 이야기라고 가정한다면,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한 뒤 단군 이야기는 평양 지방을 중심으로 구전됐을 것으로 추측한다. 또 통일신라 말기까지 그 어떤 기록에도 단군 언급이 없다는 점을 볼 때, 단군 신화는 고려가 건국되기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 북부 지방만의 지역 신화였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들어와 갑자기 단군 신화가 부각된 이유는?
1270~1280년대 고려가 몽골제국의 제후국이 되면서 몽골과 개성 사이 한반도 북부 지역에 대한 인식이 고조됐다. 여기에 최씨 무신 정권 동안 지방에서의 국가 통합 의식 부족이 노출된 것에 대한 반성이 있었다. 1202년 경주에서 신라 부흥 운동, 1217년 평양에서 고구려 부흥운동, 1237년 전라도에서 백제부흥 운동이 일어나는 등 고려왕조에 대한 지방민의 귀속 의식이 약했다. 따라서 과거의 삼국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어떤 표상이 고려 중앙의 지배자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다.
우연히 이 시기에 잘못하면 영원히 잃어버릴지도 모를 평양 지역의 단군 전승을 일연이라는 승려가 한반도 전체의 기원 신화로 부각시켰다는 게 박노자의 해석이다.
<국사> 교과서에 따르면 단군 신화는 고조선 건국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지만, 박노자에 따르면 단군은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역사적 우연에 불과하다.
■ 벼리기 아래 논제를 읽고 글을 쓴 뒤, <아하! 한겨레> 누리집(www.ahahan.co.kr)에 올려 주세요. 잘 쓴 글을 선택해 ‘통합논술 세미나’에 실어 줍니다. 1. 광개토대왕비의 이른바 ‘신묘년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아래에 여러 학자의 해석이 실려 있다.(본문에 나오는 백잔은 백제를 멸시해 부른 말) ① 그런데 왜는 신묘년(서기 391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 1970년까지 일본 학자들의 해석. 서기 391년에 야마토 정권의 군대가 한반도 남부를 공격해 백제와 신라를 정복했다는 의미로, 일본의 조선 지배와 대륙 침략을 정당화하는 주장으로 활용됐다. ② 그리하여 왜는 일찍이 신묘년(영락원년)에 [고구려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했다. 백잔이 [왜와 연결해] 신라를 [침략했다. 신라는 고구려의] 신민이었기에 [영락6년 병신년에 왕이 군대를 이끌고 백잔을 토벌했다.] → 위당 정인보의 해석. 비문은 광개토대왕의 무훈을 기록한 것이니 고구려를 칭송할 만한 내용이어야 한다는 맥락에서 해석했다. 그러나 주어가 너무 자주 바뀌어 문맥이 매끄럽지 않다. ③ 그리하여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잔 ○○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 북한의 역사가 김석형의 해석. 고구려가 백제를 쳐부수고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풀이. ④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에] 오니,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했다. 백잔이 신라를 [침략해] 신민으로 삼았다. → 북한의 역사가 박시형의 해석. 고구려가 격파한 것은 백제가 아니라 왜이며,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것은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라고 풀이. ⑤ 그런데 왜를 신묘년 이래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격파했다. 백잔은 [왜와 연결해] 신라를 [침략해] 신민으로 삼았기에, (영락6년 병신년에 왕이 군대를 이끌고 백잔을 토벌했다). → 서강대 사학과 정두희 교수의 해석. 박시형의 풀이와 비슷. 단 왜가 고구려에 왔다거나 백제가 왜를 불러들였다는 해석을 근거 없다고 봤다. (1)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에드워드 핼릿 카는 ‘역사란 해석의 역사’라고 했다. 이러한 카의 관점에서 광개토대왕비 신묘년조를 둘러싼 논쟁을 분석하시오. (600자) (2) ‘담금질’에 나오는 기호언어학의 관점을 활용해, 신묘년조 기사 해석에 차이가 나는 이유를 써 보시오. (800자) 2. ‘담금질’에 나오는 단군 신화에 대한 2가지 해석 가운데 어느 쪽이 옳다고 보는지 자신의 생각을 쓰시오. (800자) 3.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을 주제로 글을 쓰시오. (1200자)
■ 풀무질 과음하고 파티에서 돌아오던 존스는 컴컴한 길모퉁이에서, 나중에 브레이크에 결함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 차로 로빈슨을 치어 죽였다. 로빈슨은 마침 그 길모퉁이에 있던 가게에서 담배를 사려고 길을 건너던 중이었다.
사람들은 사고 원인을 존스가 과음한 탓 또는 1주일 전 그 차를 정밀 수리한 정비소의 잘못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유명인사’가 “만일 담뱃갑에 담배만 있었던들 로빈슨은 그 길을 건너지 않았을 것”이라며 “로빈슨의 흡연 욕구가 죽음의 원인”이라고 여러분을 설득한다면? 에드워드 핼릿 카는 ‘어느 유명인사’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앞뒤 내용으로 볼 때 저명한 과학철학자 카를 포퍼(1902~1994)가 분명하다. 포퍼는 헤겔·마르크스와 같은 역사주의자는 “인간 행위를 (인간 의지로부터 독립된) 인과관계로 설명함으로써 인간 자유의지를 부정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역사의 인과관계를 부정하고 우연의 구실을 강조하는 건 로빈슨이 애연가였기 때문에 죽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가는 ‘합리적 원인’과 ‘우연적인 원인’을 구분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역사를 바꾸지 않았다
레지널드 아서의 그림 <클레오파트라이 죽음> 부분. <한겨레> 자료사진
■ 마치질 “역사책은 기표들의 가장무도회” 20세기에 들어 등장한 기호언어학은 역사학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 기호언어학에 따르면 ‘언어란 생각들을 표현하는 기호체계’인데, 기호는 기표(記標·시니피앙)와 기의(記意·시니피에)로 이뤄진다. 예를 들어 ‘개’라는 물리적 형태의 글자는 ‘ㄱ+ㅐ’의 결합이다. 이 글자는 ‘네 발이 달리고 털과 꼬리가 있으며, 사람을 잘 따라 예로부터 가축으로 기르는 동물’을 의미한다. ‘ㄱ+ㅐ’가 결합해 이뤄진 ‘개’라는 물리적 형태(글자)를 기표라 하고, ‘ㄱ+ㅐ’가 가리키는 ‘네 발이 달리고~’가 기의다. 한데 ‘네 발이 달리고~’라는 기의가 왜 한국어로 ‘개’라는 기표와 결합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똑같은 짐승을 영어로는 dog라고 하고 중국어로는 취안(犬)이라고 기표한다.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자의적이다. 갑돌이가 기르는 ‘개’와 길동이가 기르는 ‘개’는 품종도 모양도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뭉뚱그려 ‘개’ 라고 부른다. 기표는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실재 그 자체를 표상하는 게 아니라, 그 개별적인 실재를 포함하는 부분 유사성만 드러낸다. 여기서도 역시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기표(지시어)는 기의(지시 대상)를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왜곡한다. 즉 언어는 총체적 존재로서의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어떤 양상만을 추상화·일반화하거나 또는 일정한 특성을 부여함으로써 실재를 왜곡한다. 역사책은 언어로 쓴다. 한데 기표와 기의로 구성된 언어가 이렇게 자의적이라면 역사책은 과연 사실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을까?
광개토대왕비
■ 담금질 단군 신화, 다른 2가지 해석
지난해 10월3일 개천절 때 천제 의식. 윤운식 기자
■ 벼리기 아래 논제를 읽고 글을 쓴 뒤, <아하! 한겨레> 누리집(www.ahahan.co.kr)에 올려 주세요. 잘 쓴 글을 선택해 ‘통합논술 세미나’에 실어 줍니다. 1. 광개토대왕비의 이른바 ‘신묘년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아래에 여러 학자의 해석이 실려 있다.(본문에 나오는 백잔은 백제를 멸시해 부른 말) ① 그런데 왜는 신묘년(서기 391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 1970년까지 일본 학자들의 해석. 서기 391년에 야마토 정권의 군대가 한반도 남부를 공격해 백제와 신라를 정복했다는 의미로, 일본의 조선 지배와 대륙 침략을 정당화하는 주장으로 활용됐다. ② 그리하여 왜는 일찍이 신묘년(영락원년)에 [고구려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했다. 백잔이 [왜와 연결해] 신라를 [침략했다. 신라는 고구려의] 신민이었기에 [영락6년 병신년에 왕이 군대를 이끌고 백잔을 토벌했다.] → 위당 정인보의 해석. 비문은 광개토대왕의 무훈을 기록한 것이니 고구려를 칭송할 만한 내용이어야 한다는 맥락에서 해석했다. 그러나 주어가 너무 자주 바뀌어 문맥이 매끄럽지 않다. ③ 그리하여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잔 ○○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 북한의 역사가 김석형의 해석. 고구려가 백제를 쳐부수고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풀이. ④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에] 오니,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했다. 백잔이 신라를 [침략해] 신민으로 삼았다. → 북한의 역사가 박시형의 해석. 고구려가 격파한 것은 백제가 아니라 왜이며,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것은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라고 풀이. ⑤ 그런데 왜를 신묘년 이래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격파했다. 백잔은 [왜와 연결해] 신라를 [침략해] 신민으로 삼았기에, (영락6년 병신년에 왕이 군대를 이끌고 백잔을 토벌했다). → 서강대 사학과 정두희 교수의 해석. 박시형의 풀이와 비슷. 단 왜가 고구려에 왔다거나 백제가 왜를 불러들였다는 해석을 근거 없다고 봤다. (1)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에드워드 핼릿 카는 ‘역사란 해석의 역사’라고 했다. 이러한 카의 관점에서 광개토대왕비 신묘년조를 둘러싼 논쟁을 분석하시오. (600자) (2) ‘담금질’에 나오는 기호언어학의 관점을 활용해, 신묘년조 기사 해석에 차이가 나는 이유를 써 보시오. (800자) 2. ‘담금질’에 나오는 단군 신화에 대한 2가지 해석 가운데 어느 쪽이 옳다고 보는지 자신의 생각을 쓰시오. (800자) 3.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을 주제로 글을 쓰시오. (120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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