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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문자는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

등록 2011-07-18 12:06

슬픈 열대
슬픈 열대
[함께하는 교육]
<슬픈 열대> 4. ‘주체적 인간’이란 없다

■ 책소개

<슬픈 열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박옥줄 옮김/한길사

“외관은 언제나 믿지 못할 것이다.”

700쪽이 넘는 <슬픈 열대>를 관통하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을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언제나’란 말이 중요하다. 레비스트로스는 ‘잠시’가 아니라 ‘언제나’ 외관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외관이 아니라 그 이면의 심층에 있다. 우리가 세포를 보기 위해 현미경이라는 도구가 필요하듯, 심층을 보기 위해 ‘이론적 도구’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기본 생각이다.

<슬픈 열대>는 1935~38년 레비스트로스가 카두베오·보로로·남비콰라·투피 카와이브족 등 브라질의 4개 원시부족 방문 과정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그러나 단지 기행문에 그치는 게 아니라 문명의 이름으로 원주민 사회를 파괴하는 ‘현대의 야만성’을 비판하는 ‘철학적 고발장’이기도 하다.


■ 풀무질

아름다운 패션 폰트. 우리는 문자를 문명의 상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게 문자는 지배와 예속의 도구일 뿐이다. 양윤정 제공
아름다운 패션 폰트. 우리는 문자를 문명의 상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게 문자는 지배와 예속의 도구일 뿐이다. 양윤정 제공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주체란 없다. 중요한 건 구조 속에 있는 각 요소들의 관계에 따라 발생하는 의미일 뿐이다. 주체는 곧 인간을 말한다. 우리는 보통 ‘주체’나 ‘인간’의 행위가 축적돼 역사가 진보한다고 생각한다. 물질·문화적 진보가 인류를 해방했다고 본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에게 그런 말은 착각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인류 진보의 결정적 증거이자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유력한 기준으로 얘기되는 문자를 그는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처음 남비콰라족을 만났을 때 종이와 연필을 선물로 줬다. 원주민들은 종이와 연필을 건드리지 않았으나 어느 날 모두 그 종이에다 물결치는 듯한 가로선을 그리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레비스트로스를 흉내 내 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금방 싫증이 나서 그만뒀다.

단 우두머리는 달랐다. 우두머리는 레비스트로스에게서 메모지를 얻은 뒤 그와 한 대화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우두머리는 구불구불한 선 몇 개를 그리곤 했다. 그러고는 자기 부족민들 앞에서 읽는 체했다. 원주민들이 제공하는 물건의 대가로 레비스트로스가 내놓아야 할 것들, 즉 벌목용 칼이나 진주 등 물건 목록을 열거했다. 이는 자기 부족민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그 거래가 자기의 중개로 이뤄지고 있으며, 자신이 백인들과 결연을 맺어 마음을 같이하고 있다고 동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문자의 지배력 강화 기능을 족장은 이해했다

우두머리는 문자가 자신의 지배력을 훨씬 강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남비콰라족에게 문자는 지적인 목적이 아니라 사회적인 의미로 드러났다. 무엇을 알거나 이해하거나 새겨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랫사람들을 희생해서 한 개인, 또는 한 기능의 권위와 특권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이 일단 쓰는 법을 알면 하나의 커다란 지식체계를 축적할 수 있다. 이 인위적인 기억의 발달과 함께 현재와 미래를 조직하는 좀더 큰 능력이 생긴다. 글을 쓰는 집단은 하나의 지식체계를 축적하고, 집단에게 부여된 목적을 향하여 훨씬 빨리 움직여 나가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문자가 마치 인류 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처럼 보는 시각을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상 가장 창조적인 때의 하나는 농업과 야생동물의 가축화 및 기타의 기술을 발생시킨 신석기 혁명(기원전 7000~1만년)이다.

신석기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수천 년 동안 인간은 관찰하고 실험하고, 고찰 결과를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정은 문자가 없어도 가능했다. 기원전 3000~4000년께 출현한 문자는 신석기 혁명이라는 오랜 노력의 결실이었다. 문자가 신석기 혁명의 필요조건은 아니었다.

문자가 있던 이집트인이나 수메르인의 건축술은 뛰어났다. 그러나 그들의 건축술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무렵 아직 문자를 모르고 있던 원주민들의 솜씨보다 더 나았던 건 아니다.

신석기혁명이 산업혁명보다 의미 있다

신석기 시대에서 인간들은 문자 없이도 큰 진전을 이뤘다. 문자가 서구 세계의 문명들을 오랜 정체로부터 구원해 주지도 않았다. 문자 발명에서 근대 과학이 발생하기까지 무려 5000년이나 걸렸다. 문자의 출현과 문명의 어떤 다른 특징을 연관시킨다면, 도시와 제국의 형성일 것이다. 도시와 제국의 형성에 따라 상당수 개인들이 하나의 정치체계 속에 통합되고, 계급 구조 속에 들어갔다.

레비스트로스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이 현상은 인간을 계몽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약탈을 조장하는 듯하다. 이 약탈은 노동자를 수천 명씩이나 모아서 그들의 체력이 닿는 데까지 일을 시킬 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건축의 시작이 이 같은 약탈에 의존했음을 인식해야만 한다.”

“문자는 인간의 지식을 공고하게 만들지는 않고 하나의 영속적인 지배체계의 확립에 불가결한 존재가 되어왔던 것 같다. ”

레비스트로스는 산업혁명보다 신석기 혁명을 더 의미 있다고 본다. 신석기 시대에 인간들은 자신의 안전에 필수적인 대부분의 발명품들을 이미 만들어냈다. 이미 추위와 배고픔에서 벗어났다. 생각할 여유도 있었다. 단 신석기 시대는 아직 질병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위생 관념의 진보가 되레 다른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킨 면도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예컨대 질병 예방은 그 부작용으로 대기근이나 대살육전 또는 인구 팽창을 막아야 할 필요성-의술이 발전하지 못한 옛날에는 전염병이 인구 팽창을 막는 데 크기 기여했고 인구 조절을 하는 방법으로 대기근이나 대살육전보다 결코 더 무서운 게 아니었다- 같은 것을 낳게 할 수도 있다.”

■ 마치질

“‘주체’란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

“(주체는) 철학의 무대에서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잡아 왔고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졸라댐으로써 진지한 작업을 방해해 온 지긋지긋하리만큼 버릇없는 아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 대계 4권 <벌거벗은 인간>에 나오는 말이다. 구조주의 철학은 궁극적 의미를 ‘주체’나 ‘나’, ‘인간’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걸 거부한다.

자크 라캉에 따르면 어린아이에게는 ‘나’란 관념이 없다. 탁기형 선임기자
자크 라캉에 따르면 어린아이에게는 ‘나’란 관념이 없다. 탁기형 선임기자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자로 유명한 자크 라캉의 이론을 빌려 보자.

‘길동이’라는 어린아이가 있다고 하자. 이 이름은 부모가 붙여줬다. 아이는 대개 4~5살이 될 때까지 ‘나’라고 말하지 못한다. 부모가 형인 길수에게 “장난감을 사주겠다”라고 하면 길동이는 “나도 사줘”라고 하지 않는다. “길동이도 사줘”라고 한다.

‘자기 동일성’이 처음부터 주어진다는 건 환상이다. 최초로 제시되는 건 타인과의 관계에서 노는 ‘길동이’일 뿐이다. 타인이 있어야 ‘내’가 있다. 타인이 없으면 ‘내’가 성립할 수 없으므로, 동일성은 그 자체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인식된다.

주체에 대한 믿음은 역사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진다. 이 진보를 이룩한 자가 역사의 주체가 된다. 서양인들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야만인으로 생각했다. 야만인은 ‘진보한 문명인’이자 ‘문명의 주체’인 백인의 손에 의해 개화되어야 했다. 그 결과 인디언의 90%가 죽어나갔다.

“인간이 과거 수천 년 동안에 이룩한 것이라곤 반복의 역사밖에 없다”, “야생의 사고나 현대의 사고나 그 지식이 다를 뿐 논리는 같다”고 본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이라면, 그런 일은 벌어질 수 없다.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자 루이 알튀세르는 반인간주의(반휴머니즘)를 내세웠다. 그는 주체를 상정하면, 인간이 해방되는 게 아니라 주관적인 관념의 포로로 전락한다고 봤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인간에서 출발하면 필연적으로 ‘자유’나 ‘창조’와 같은 관념주의의 유혹을 피할 길이 없다. ‘자유’라는 말은 인간의 ‘자유로운 능력’이라는 환상을 심어준다. 현실 속에서 생산수단이 없는 프롤레타리아는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을 팔아야만 하는데 ‘자유로운 노동’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자유로운 시장’에서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자본가와 ‘자유로운 계약’을 맺고 ‘자유롭게 노동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 속 인간들과 똑같다.

“집단의 구성원인 한에서 인간들은 각자가 개인으로서 느끼는 것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각자는 그렇게 행동하도록 그에게 허용되고 규정된 방식에 따라서 느낀다.”(레비스트로스 <오늘날의 토테미즘>)

■ 담금질

구조주의는 역사에서 숫자를 무시한다

1. 반값 등록금을 요구하는 집회가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고 하자. 1일에는 1000명이, 10일에는 1만 명이, 30일에는 100만 명이 모였다고 하자. 이 3개의 숫자는 의미가 있을까 없을까?

사례 1의 사건을 요소로 분해해 보자. 사람, 서울광장, 반값 등록금 등이다. 1000명이 모일 때나 100만 명이 모일 때나 요소는 같다. 구조주의 견지에서 이 사건의 구조는 같다. 차이는 오직 숫자뿐이다. 그러나 1000명과 100만 명의 차이는 엄청나다. 1000명이 모였다면 정부는 그냥 무시해도 된다. 그러나 100만 명이 모였다면 서둘러 반값 등록금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만약 1000만 명이 모였다면? 정권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등록금 반값 촉구 촛불집회. 이종근 기자
등록금 반값 촉구 촛불집회. 이종근 기자

에드워드 핼릿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 2장 ‘사회와 개인’에서 “역사란 상당한 정도까지 숫자의 문제”라고 썼다. 숫자가 엄청나면 구조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숫자를 무시한다.

2. A라는 사람이 서울에서 부산 해운대해수욕장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을까? 간단히 생각하면 다음과 같다. 더 세분한다고 해도 20개 안팎일 것이다.

① 걷기 ② 자전거 ③ 승용차(자가용/렌터카/친구·친척차 동승) ④ 열차(무궁화/새마을/KTX) ⑤ 고속버스 ⑥ 비행기(일반항공/저가항공/헬리콥터) ⑦ 시내버스.

첫째 질문. A는 해운대까지 이동 수단의 자유가 있을까 없을까? ‘걷기’라는 한 가지 수단밖에 없는 원시인이나 짐승에 비하면 무려 20개나 있기 때문에 자유롭다. 그러나 A의 이동 수단이 무한한 건 아니다. ‘겨우’ 20개일 뿐이다.

더구나 A가 평범한 회사원이라면 해운대해수욕장에 갈 수 있는 시기는 1주일 정도인 ‘여름휴가’로 한정될 것이고, 이동 수단 목록에서 걷기·자전거·헬리콥터·시내버스 등은 빼야 할 것이다. 만약 재벌가 자녀 B라면? B는 시간과 이동 수단에 별로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 A와 B는 겉으로는 똑같이 ‘주체적 자유인’이지만 현실에서 둘의 처지는 크게 다르다. 이런 면에서 구조주의는 ‘자유로운 주체’란 사실상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둘째 질문. 앞에서 말한 이동 수단의 차이는 의미가 있을까 없을까?

일단 서울에서 해운대해수욕장까지 ‘사람의 이동’이라는 면에서 방법 차이는 없다. 레비스트로스 식으로 말하면 구조는 같다. 그의 눈에 이동 수단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이동 수단 자체에 의미가 있다. 만약 A가 ‘걷기’를 택한다면 그는 조선시대 사람일 것이다. 혹시 A가 10초 만에 서울에서 해운대까지 가는 수단을 택한다면? 그는 아마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듯 ‘순간이동’이 가능한 미래에 살고 있을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스승으로 삼았던 마르크스는 관계나 구조뿐만 아니라 요소도 중시했다. 그는 “맷돌은 봉건 영주의 시대를 불러오고, 증기 제분기는 산업자본가의 시대를 불러온다”고 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우리는 인간이 과거 수천 년 동안에 걸쳐서 이룩해 놓은 것이라고는 반복의 역사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썼다.

■ 벼리기

아래 논제를 읽고 글을 쓴 뒤, <아하! 한겨레> 누리집(www.ahahan.co.kr)에 올려 주세요. 잘 쓴 글을 선택해 ‘통합논술 세미나’에 실어 줍니다.

1.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을 레비스트로스의 관점에서 비판해 보시오. 그리고 둘 가운데 누가 옳은지 평가해 보시오. 아래 지문을 참고하시오. (1200자)

①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됐고,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내가 일생을 바쳐서 목록을 작성하고 또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될 제도나 풍습 또는 관습들은 만약 이것들이 인간성으로 하여금 그것의 운명 지어진 역할을 수행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면, 전혀 무의미해지고 마는 어떤 창조적 과정에서의 일시적인 개화다. 그러나 그 역할은 우리 인간에게 어떤 독립적인 위치를 배당하지는 않는다.”

“인간성의 운명적인 역할과는 전혀 달리, 인간의 역할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욱 완전한 점에까지 도달해 있는 하나의 기계와 같다.”

“나는 존재한다. 그렇지만 결코 하나의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점에서 나는 머릿속에 밀집되어 있는 수백만 신경세포로 이뤄진 사회와 그 사회에 하나의 로봇으로서 봉사하는 나의 내체(內體) 간의 투쟁에 끊임없이 관여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② 프랑스의 해석학자 폴 리쾨르는 “구조주의는 구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사건을 그늘 속으로 묻는다. 그러나 역사는 사건의 발생을 중심으로 해 의미를 찾는다”며 “물론 모든 사건이 다 의미를 지니는 건 아니지만 철학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지울 수 없는 사건의 메시지가 있다. 구조주의는 사건의 메시지를 해독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도 “구조주의는 역사를 희생시키고 구조만을 응시하기 때문에 역사와 사회를 동태적으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정태적’으로만 본다”고 비판했다. 그는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자인 알튀세르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숙달된 해부학자에 의하여 살을 제거한 뼈들만이 분해되고 해체되고 이어서 주의 깊게 관절을 고려하면서 다시 조립된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사상인가? 그것은 하나의 해골이다.”

-김형효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 발췌

2. 아래 지문은 에드워드 핼릿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제2판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이 주장이 레비스트로스에게도 해당되는지 아닌지 자신의 생각을 써 보시오. (800자)

나의 결론은 파괴와 쇠퇴 이외에는 아무것도 내다보지 않으면서 진보에 대한 모든 신념과 인류에 의한 더 나은 진보에 대한 모든 전망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배제해버리는 오늘날의 회의주의와 절망의 조류는 엘리트주의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의 주된 창도자들은 지식인들, 즉 자신들이 봉사하고 있는 그 사회의 지배집단의 이념을 전파하는자들(‘한 사회의 이념은 그 사회의 지배계급의 이념이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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