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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자살공화국’에서 벗어나는 길

등록 2011-08-08 11:57

<자살> 이진홍 지음, 살림.
<자살> 이진홍 지음, 살림.
안광복 교사의 시사쟁점! 이 한권의 책
41. 자살 - 자살은 권리인가, 범죄인가?
“자살은 자연이 준 선물이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플리니우스의 말이다. 누구나 태어나면 죽는다. 가늘고 모질게 이어지는 삶은 그 자체로 고통이다. 죽어야 할 때, 적절한 순간에 세상을 떠나는 것은 ‘행운’ 아닐까? 인간은 죽음을 한없이 기다리고 있지 않아도 된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리니우스가 자살을 선물이라고 한 이유다.

철학자 세네카는 한발 더 나아간다. 그는 자살을 ‘자유를 얻는 통로’라고 했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이 지속 가능한 시간까지가 아닌, 자기가 생존하려고 할 때까지만 생존한다’고 내뱉기까지 했다. 자살을 용기 있고 현명한 사람이 하는 ‘선택’으로 추어올린 꼴이다.

심지어 로마의 마실리아(지금의 프랑스 마르세유)에서는 독약을 시민들에게 나눠주기까지 했다. 자기가 죽어야 할 이유를 충분히 내놓는다면, 정부한테서 죽음에 이르는 약을 받아낼 수도 있었다.

이처럼 자살은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권리(?)’처럼 여겨졌었나 보다. 반역에 실패한 장군들도 자살을 혜택처럼 누렸다. 그들은 자신의 노예와 땅을 황제에게 바쳤다. 그러곤 따뜻한 물을 채운 욕조에서 칼로 정맥을 그었다. 황제는 자살한 이의 가족을 돌봐주었다. 반란을 다스리기 위한 ‘정치적 타협’이었던 셈이다. 반면, 죄수들은 자살할 권리마저 빼앗겼다. 사형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살하면 국가는 죄인의 재산을 모두 차지했다. 이렇게 보면, 로마에서는 자살을 권하는 분위기가 퍼졌던 듯 보인다.

그러나 인문학자 이진홍은 자살에 숨겨진 맥락을 정확히 짚어낸다. 로마 시대에 자살은 오히려 금지에 가까웠다. ‘자살은 현명한 자가 하는 일’이라는 세네카의 말을 뒤집어 보라. 깨어 있지 않은 자의 자살은 바보 같은 짓이다. 뛰어난 사람의 자살은 삶에 대한 강한 긍정을 담고 있다. 그들은 올곧은 삶을 이루지 못하겠다고 여긴 순간, 죽음으로 자기 삶을 ‘완성’한다. 이들에게 자살은 자기 생명을 버리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일생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결말을 짓는 결단이다. 의미 있는 자살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서양 중세(中世)에 와서 자살은 범죄가 되었다. 죽고 사는 문제는 신(神)이 결정할 문제다. 자기 마음대로 생명을 버리는 짓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그래서 교회는 앞장서서 자살자에게 벌을 주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신국론>에서 자살을 강하게 비판한다.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생명을 포기할 권리는 인간에게 없다.”, “저지른 죄 때문에 자살하려는 시도도 옳지 못하다. 완전히 죄를 갚기 위해서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 시대에 자살은 씻지도, 용서받지도 못할 죄악으로 여겨졌다. 권력자에게도 자살은 괘씸한 범죄였다. 죄를 가늠해 벌을 주는 일은 정부의 몫이다. 사형을 내릴 권한을 스스로에게 행사하는 자는 범죄자일 뿐이다. 국가는 자살자를 철저하게 다스렸다. 무덤을 파내고 재산을 빼앗은 정도는 기본이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시체의 얼굴을 땅에 닿도록 해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끌고 다녔단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자살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자살을 ‘권리’로도, ‘범죄’로도 보지 않는다. 이제 자살은 고쳐야 할 ‘마음의 병’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살하려는 이들을 불쌍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곤 따뜻하게 보듬어 주려 한다.

게다가 자살자는 피해자이기도 하다. 죽음을 결심할 정도면 삶이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모든 자살은 주변과 세상에 대한 하나의 경고다.’ 자살은 가족과 주변 사람들도 피해자로 만든다. 아끼는 사람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은 엄청난 마음의 짐으로 남을 테다.

그러나 꼭 자살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자살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묘하게 비꼰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특별하게 행동합니다. 죽은 자에 대한 모든 비난은 흘려버리고, 그가 저지른 모든 비리는 용서합니다. 그러곤 ‘오직 좋은 것만 말하십시오’라고 주문합니다. 장례식 추도사와 묘비에는 오직 죽은 이의 장점만을 적습니다.”

일단 죽음을 맞으면 모든 평가는 너그러워진다. 심지어 적군(敵軍) 병사였다 해도, 죽은 자는 정중하게 대하지 않던가. 이런 분위기에서 자살이 ‘전염’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을까? 삶이 버거울 때, 커다란 잘못으로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을 때, 자살은 묘하게 위안으로 다가온다. 목숨을 끊고 나면 모든 잘못은 덮어진다. 비난에 열 올리던 이들에게는 죄책감이라는 복수를 안길 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세상에 위로가 없을 때 죽음을 택하기는 더욱더 쉬워진다.

그러나 자살은 엄연한 살인 범죄다.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을 살해하는 짓’ 아니겠는가. 물론 지은이 이진홍은 자살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눈으로’ 바라보라고 말한다. 걱정과 염려에는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일어난 일을 사회 전체의 틀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찌되었건, 자살을 막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누구도 반대를 내놓지 않는다.

국회에서 김태원 의원이 자살 위험 있는 사람의 통화내역을 볼 수 있게 하는 법안을 발의(發議)했다고 한다. 지금의 법으로는 ‘범죄 수사에 필요한 경우에만’ 전화기록을 열어볼 수 있다. 자살을 개인이 누릴 최후의 권리로 본다면 이 법안은 악법(惡法)이다. 반면, 자살을 치료해야 할 치명적인 질병으로 여길 때, 이 법안은 치료에 필요한 조치가 된다. 자살을 범죄로 본다면? 사회 안전을 위해 꼭 있어야 할 형법(刑法)이 될 테다. 입법(立法) 논의 가운데, 자살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대한 깊은 반성도 있었으면 좋겠다.

[난이도] 고2~고3

철학박사, 중동고 철학교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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