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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이성과 계몽의 산물

등록 2011-08-22 10:38

통합논술 세미나

<계몽의 변증법>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지음/김유동 옮김/문학과지성사

“계몽으로 프랑스혁명이 가능했는데, 그 이후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파시즘과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스탈린주의라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대표하는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저작 <계몽의 변증법>을 관통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바로 이것이다. 두 사람은 이성과 계몽에 근본적 한계가 있다고 본다. 이성과 계몽이 자연뿐 아니라 ‘제2의 자연’으로서 인간과 사회를 지배·관리하면서 파시즘이라는 괴물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1947년 초판이 나온 <계몽의 변증법>은 한때 잊혀진 책이었으나 되레 현재의 자본주의 분석에 더 유용해 보인다. 단, 분석은 정교하나 문제 해결 방안은 찾기 힘들다는 게 한계다.

■ 풀무질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둘 다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이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400만명이 죽어나갔다. 죽은 사람의 수도 많았지만 더 놀라운 건 학살 방법이었다.

수용자들은 가스실에서 살해되거나 인체 실험의 대상이 됐다. 희생자의 유품은 재활용품으로 변했다. 장신구는 물론 금니까지 뽑아 금괴로 만들었으며, 머리카락을 모아 카펫을 짰다. 뼈는 갈아서 비료로 썼으니 사람의 몸뚱이 가운데 버릴 게 하나도 없었다.

문명인들은 식인종이 같은 종을 먹는다고 야만인이라 욕했으나 정작 그들의 행동은 식인종보다 악랄했다. 문명인은 같은 인간을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죽였다. 본능만 있는 짐승은 이렇게 할 수 없다.

‘체계와 효율’은 이성·계몽의 산물이자 상징이다. 그래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 서문에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라고 물었던 것이다.

“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완전히 계몽된 지구에는 재앙만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계몽의 변증법> 1장)

<계몽의 변증법>은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을 분석한다. 베이컨은 “아는 게 힘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는 게 힘이다’라는 말에 계몽의 위험성이 들어 있다. ‘힘’은 자연을 지배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이게 인간과 사회를 지배하는 테러 수단이 됐다.

베이컨은 “인간의 우월성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지식에 있다”며 “우리가 자연의 인도를 받아 발명에 전념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자연 위에 군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은 더 나갔다. 인간의 지식은 인간을 노예화하는 데 있어 어떠한 한계도 몰랐다. 지식의 목표는 ‘방법’, ‘타인 노동의 착취’, 그리고 ‘자본’이었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법에 불과했다.

권력과 인식은 동의어가 됐다. 베이컨이 말했듯 ‘아는 게 힘’이다.

“아는 게 힘이다”는 위험한 말


아우슈비츠 수용소.  <한겨레> 자료사진
아우슈비츠 수용소. <한겨레> 자료사진
중요한 것은 “조작”, 즉 효율적인 처리방식이다. 인간에게 세계는 항상 카오스(혼란)로 묘사되고 이것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종합하는 것은 구원이 된다. 근대과학으로 나가는 도정에서 인간은 ‘의미’를 포기한다.

계산 가능성과 유용성이라는 척도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계몽에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계몽은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아예 존재나 사건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계몽의 이상은 세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도출해낼 수 있는 ‘체계’다.

체계는 일목요연하다. 일목요연을 위해 무정형한 자연이나 소외된 특수자, 나와 다른 비동일자는 배제되고 축출된다. 히틀러가 ‘게르만 민족과 다른 유대인’을 배제하고 축출했듯 말이다.

계몽에는 ‘세계의 계산 가능성’이 중요하다. 그래서 숫자는 계몽의 경전이 되었다. 계몽이 사물에 취하는 행태는 독재자가 인간들한테 취하는 행태와 같다. 독재자는 인간들을 조종할 수 있는 한 인간들을 안다. 과학적인 인간은 그가 사물을 만들 수 있는 한 사물들을 안다. 사물은 언제나 동일한 것, 즉 ‘지배의 대상’이라는 데에 그 본질이 있는 것이다.

체계화는 각 개별 사건이나 사물의 질은 무시하고 ‘획일화’를 강요한다.

계몽은 숫자를 우상숭배한다

계몽은 전체주의적이다. 계몽의 비진리성은 그 진행 과정이 사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데 있다. 수학에서는 어떤 미지수가 방정식의 미지수가 되면 값을 대입해보지 않아도 이미 알려진 것으로 인정된다. 계몽은 사유와 수학을 일치시키려 하는 것이다.

계몽은 모든 걸 물질적 대상으로 취급한다. 모든 걸 ‘계산 가능한 존재’로 환원한다. 이것만이 ‘객관적’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물화(物化)다. 정신이 물화되면서 사람들 간의 관계나 개개 인간의 자신에 대한 관계도 악령에 사로잡힌다. 애니미즘이 사물을 점령화했다면 산업주의는 영혼을 물화한다.

대량 생산과 그것이 만든 문화의 수많은 브로커들에 의해 규범화된 행동 양식은 유일하게 자연스럽고, 품위 있고, 합리적인 양식으로 개인의 뇌리에 박힌다. 그는 단지 사물로서, 정적인 요소로서, 성공 혹은 실패로서 규정될 뿐이다.

이성 자체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경제 기구의 단순한 보조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게 도구적 이성이다. 올바른 이성은 단순히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규제하는 것을 넘어 목적을 이해하고 반성하는 도구라면, 도구적 이성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 이성이 자기 유지의 도구로 전락한다. 사유는 실천적 목적, 특히 경제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사회의 과도한 성숙은 피지배계급의 미성숙을 먹고 산다. 오늘날 대중의 퇴행은 들을 수 없는 것을 자신의 귀로 듣고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자신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능력의 결핍을 의미한다.

■ 마치질

인간의 끝없는 자기파괴 욕구

인간은 이성이 있다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인간이 본능만 있는 동물보다 못한 경우가 많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뿐만 아니다.

예를 들어 원자력을 보자. 원자력 자체는 자연환경의 제약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면이 있다. 그러나 원자력 기술을 이용해 인간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해 한꺼번에 약 10만명을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죽인 것이었다.

더구나 단 한 번으로 끝나지도 않았다. 오늘날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해 전세계에 있는 핵탄두만으로 인간이란 종 자체를 멸종시킬 수 있다. 그런데도 인간은 핵폭탄을 없애려 하지 않는다. 다양한 변명과 해명이 있지만 결국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말한 ‘이성의 자기 파괴’의 한 사례일 뿐이다.

자기가 멸종할 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인간 이성의 한계는 무엇일까? 유용성·효율성에 대한 집착이다. 도구적 이성은 유용성과 효율성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는 객관적 수치로 측정된다. 객관적 숫자 앞에 다른 모든 반박은 무기력해진다.

‘100+100=200’이다. 사실이다. 또 진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리물리학을 제외한 분야에서 사실이 곧 진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도구적 이성은 ‘사실=진리’라고 강요한다.

100이라는 자원을 투입해 120이라는 효과가 발생한다면 효율성은 20%다. 그러나 100이라는 자원이 결과물을 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부작용은 계산에 넣지 않는다. 부작용은 엄격하게 숫자로 측정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1000억원으로 댐을 만들어 매년 100억원의 전기를 생산한다면, 10년이면 건설 비용을 회수한다. 10년이 지나면 이익이 발생한다. 유용하고 효율적이다.

그러나 댐 건설은 생태계를 파괴한다. 파괴된 생태계는 나중에 인간에게 보복할 것이다. 그러나 그 보복은 댐 건설 한참 뒤에야 이뤄진다. 더구나 이 피해는 숫자로 측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매년 100억원어치의 전기 생산만이 중요하게 보인다.

올 3월 일본에 강진이 발생해 후쿠시마 원전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원자력은 ‘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게 입증됐다. 독일은 2022년까지 자국 안 모든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기로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모두 ‘유용성과 효율성’을 내세운다. 현재 인간의 기술로는 원자력만큼 효율적인 에너지가 없다는 것이다.

2009년에 나온 전력거래통계집을 보면, 킬로와트당 발전단가가 원자력 35.64원, 태양광은 677.38원, 액화천연가스 153.06원, 풍력과 수력이 109원, 석탄이 60.31원이다. 킬로와트당 발전단가라는 숫자로 표시된 효율성 앞에 다른 논리는 ‘비효율적=비이성적’으로 치부된다.

인간의 이성은 반성하지 않는다. 유용성과 효율성 앞에 이성과 계몽이 잘못됐을 수 있다는 반성은 존재하기 힘들다. 그런 반성을 얘기하는 사람은 비효율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혀 사회에서 매장되기 십상이다.

■ 담금질

박지성·소녀시대·한예슬의 공통점은?

박지성·김연아·한예슬·장근석·소녀시대·박찬호·카라 등의 공통점은?

이들이 활동하는 분야는 다르다. 이들의 부모형제, 친구, 인간성, 매력, 사는 곳, 패션, 얼굴 생김새, 능력 모두 같지 않다. 그러나 이들을 측정할 수 있는 한 가지 기준이 있다. 바로 ‘몸값’이다.

영국 프로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2005년부터 활동중인 박지성 선수는 최근 재계약을 해 2013년 6월까지 뛴다. 박지성의 연봉은 약 86억원 정도가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 각종 광고 출연료 등이 있으니 박지성의 ‘몸값’은 더 높을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작은 우주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박지성이라는 한 인간을 소우주로 보지 않는다. 그의 다양한 인간적 면모와 특질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몸값만이 그의 가치를 대변한다.

유명 스타만 그런 게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무엇보다 몸값으로 측정된다. 요즘 확산중인 연봉제는 한 인간의 모든 능력과 특질을 오직 ‘연봉’이라는 몸값으로 표현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드라마·노래에서 가장 흔해 빠진 소재가 ‘사랑’이다. 이 사랑의 결실이 결혼일 것이다. 그러나 결혼에서도 ‘사랑’은 물질적 관계 위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직후의 일본 히로시마의 모습.  사이언스북스 제공
원자폭탄이 떨어진 직후의 일본 히로시마의 모습. 사이언스북스 제공
지난해 12월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발표한 ‘대한민국 2030 미혼남녀 결혼인식’ 연구조사 보고서를 보자. 이 보고서에서, 우리나라 여성들의 이상적인 남편감은 ‘공무원이거나 공사를 다니면서 연소득 4300만원에 자산 2억4000만원, 키 177㎝ 이상’이었다. 이상적인 신붓감은 ‘연소득 3210만원, 자산 1억6045만원, 키 163.56㎝’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게 상품이다. 상품은 시장에서 교환되어야 한다. 한데 서로 교환하기 위해서는 동등한 평가 기준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가격’을 매긴다. 사물은 오직 가격을 가질 때만 의미를 지니며 다른 것과 교환될 수 있다. 이 교환을 통해서만 나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

나는 중국에서 생산된 선풍기를 소비함으로써 그 물건을 생산한 공장주 및 그 선풍기를 생산한 노동자와 관계를 맺는다. 물론 이 관계는 인격적 교류는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 이걸 물화(物化)라고 한다. 자본주의적 인간관계는 계산 가능한 상품의 교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한다.

“그래서 숫자는 계몽의 경전이 되었다. 이와 똑같은 동일시가 시민적인 정의나 상품교환도 지배한다. ……시민 사회는 ‘등가 원칙’에 의해 지배된다. 시민 사회는 ‘동일하지 않은 것’을 ‘추상적인 크기’로 환산함으로써 비교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계몽’에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것, 나아가 결국에는 ‘하나’로 될 수 없는 것이 ‘가상’으로 여겨진다.” (<계몽의 변증법> 1장)

■ 벼리기

아래 논제를 읽고 글을 쓴 뒤, <아하! 한겨레> 누리집(www.ahahan.co.kr)에 올려 주세요. 잘 쓴 글을 선택해 ‘통합논술 세미나’에 실어 줍니다.

1. ‘물화’ 개념을 사용해서 아래 지문을 분석하시오. 지문 분석 때 <통합논술 세미나> ‘풀무질’ ‘마치질’ ‘담금질’에 나오지 않는 사례 2개 이상을 반드시 들어 설명하시오. (800자)

인간을 일러 사회적 존재라 하는데, 이는 인간이 관계적 존재라는 뜻이다. ‘나’라는 존재는 다른 존재와 아무 연관도 없이 단독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다른 차원의 존재로 바뀐다. 예컨대 나보다 우월한 사람을 만나면 나는 상대방으로부터 감화와 교훈을 얻게 되거나, 존재의 연약함을 보호받게 된다. 나보다 약한 사람을 만나면 그를 물질적·정신적으로 도와주어야 하는 시혜적 존재가 된다. 그러나 나와 동등한 사람을 만나면 경쟁을 하거나 협조를 하면서 일을 해내는 가운데 인간의 보편성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공자가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라고 설파한 데는 이처럼 인간관계 가운데 나의 존재가 변화를 겪을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나’라는 주체는 대상이 되는 다른 인간의 영향을 받으며, 사회적 관계에 편입된다. 그런데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다른 사람은 나와 밀착된 의미연관을 가지기 어려우며, 사회적 관계의 형성도 제한된다. 이처럼 연관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되 사물로 존재하는 ‘그것’으로서의 인간이다. 따라서 남과 대면하면서 존재의 향상을 가져오지 못하는 인간관계는 왜곡된 것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은 물론 사물과도 관계를 맺게 된다. 조각가는 대리석을 다루어 조각 작품을 만든다. 농부는 곡식을 심고 채소를 기른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각가나 농부는 대상으로부터 약간의 감흥과 즐거움을 얻을 수는 있지만, 자신의 존재가 근본적인 변화를 겪지는 않는다. 주체로서 인간이 만나는 다른 인간이 돌, 나무, 쇳덩이 같은 것들처럼 서로 간에 아무런 영향을 주고받지 못할 때, 타인은 사물화되어 존재론적 의미 영역에서 멀어진다. 인간이 이처럼 사물화되는 경향은 현대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이는 우리가 극복해야만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사물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대상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러한 관심은 윤리성을 띤다. 윤리적 관심이라야 존재의 의미를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도된 관심은 인간관계는 물론 인간의 존재의미를 훼손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이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2011학년도 서울대 수시모집 논술 고사> 지문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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