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 - 자본주의 위기의 해법은?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
데이비드 하비 지음
최병두 옮김/한울아카데미 1935년,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새해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궁핍한 자는 자유인이 아니다.” 그는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소리 높여 외쳤다. 나라가 나서서 배고픈 서러움을 없애야 한다는 뜻이다. 이때부터 국가는 경제 발전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반면,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는 전혀 다른 소리를 한다. 국가는 잠자코 물러나 있어야 한다. 정부가 애먼 간섭을 할수록 경제는 꼬여만 갈 테다. 제아무리 뛰어난 관리도 시장만큼 수요와 공급을 잘 맞출 리 없다. 게다가 권력을 쥔 자들은 이익에 휘둘려 경제 흐름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기도 한다. 경제를 제대로 굴리려면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는 쪽이 낫다.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부터 인기를 끌었다. 세계 경제가 어려워지자, 여러 나라들이 복지 제도를 버거워했던 때문이다. 모든 것을 시장과 개인의 능력에 맞기라는 주장은 ‘복음’(福音)으로 다가왔다. 복지에 들어갈 씀씀이가 줄어들수록 국가는 짐을 덜지 않겠는가.
과연 신자유주의는 성공을 거두었을까? 명망 높은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고개를 흔든다. 여러 나라 정부들이 경제를 쥐락펴락했던 1960년대, 세계 경제성장률은 3.5%에 이르렀다. 신자유주의가 퍼진 1980년대에 성장률은 1.4%에 그쳤다. 그나마 1990년대에는 1.1%, 2000년대에는 1% 아래를 기록하고 있다. 시장에 내맡겨두었더니 경제가 주저앉은 꼴이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가 옳다며 목청 높이는 이들이 많다. 신자유주의가 가진 자들의 몫을 늘려놓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미국 소득 상위 1%는 미국 전체 수입의 8%를 차지했다. 20세기가 끝날 즈음, 그들의 몫은 15%에 이르렀다. 신자유주의를 따르고 있는 나라들은 하나같이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소유권, 자유 시장, 자유 무역을 강조한다. 기업한테 자유를 한껏 쥐여주면 복지도 훨씬 좋아지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하비는 코웃음을 친다. 신자유주의는 ‘계급 권력 회복 프로그램’일 뿐이다. 복지제도에 돈을 대느라 허덕였던 가진 자들에게 힘을 되돌려주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신자유주의는 경제를 자라나게 하지 못했다. 못 가진 자들의 것을 빼앗아 가진 자들에게 몰아주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탈취에 의한 축적’(accumulation by dispossession)으로 부(富)를 불린다.
예를 들어보자. 신자유주의는 민영화(民營化)를 부르짖는다. 철도, 전기, 은행 등 국가가 꾸렸던 분야들은 민간으로 넘긴다. 그리고 외국돈이 자유롭게 오가도록 금융 장벽을 낮춘다. 빚에 허덕이는 나라에는 부채를 갚는 데 쓰라며 더 많은 돈을 빌려준다. 그러면서 돈이 드는 복지 제도는 줄이라고 요구한다. 그 결과, 가난한 나라의 재산은 부자 나라가 삼키기 좋은 모양새로 바뀌어 간다. 국가가 관리하던 알토란 같은 회사들도 부자들의 손에 떨어진다. 원래 투자를 잘못한 책임은 투자자에게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은 돈을 빌린 이들에게 탓을 돌린다. 부자 나라가 손해를 보는 대신, 갚아야 할 나라에 더 무거운 짐을 지우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신자유주의는 힘세고 돈 많은 이들이 유리한 세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이제 어려움에 부딪혔다. 벌어지는 빈부격차는 세계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가난한 이들은 더 이상 돈이 없다. 물건을 사지 못한다. 따라서 상품도 팔리지 않는다. 반면, 부자들은 넘치는 부를 부동산과 증권 등에 몰아넣었다. 당연히 땅값과 주식 값은 껑충 뛰었다. 하지만 주식과 부동산은 기대만큼 이익을 낳지 못한다. 주식과 부동산의 이익도 결국은 공장과 가게에서 나오는 탓이다. 물건이 팔리고 공장이 돌아가야 주식도 오르고 집세도 받지 않겠는가. 결국 주식과 부동산의 가격은 추락할 수밖에 없다. 한편, 가난한 이들은 줄어든 수입을 메우기 위해 빚을 진다. 나락으로 빠져드는 경제상황, 빚을 갚을 길은 점점 막막해진다. 그래서 세상 곳곳에서 빚은 늘어나고 재산 가치는 폭락한다. 하비가 짚어낸 현재 금융위기의 원인이다. 지금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하비는 ‘계급’을 끌어들인다. 신자유주의는 가진 자들에게 풍요로움을 몰아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렇다면 피해를 보는 이들도 뭉쳐야 하지 않을까? 가진 자들에게 맞서려면 힘을 모아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앞세운다. 그래서 사람들은 깜빡 속아 넘어갔다. 억압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은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자유란 ‘기업 활동의 자유’였을 뿐이다.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위해서라면, 정부는 언제든 신자유주의의 깃발을 내던져 버린다. 시장에 적극 뛰어든다는 뜻이다. 그래서 칼 폴라니는 신자유주의란 ‘더 많은 소득, 여유와 안전이 필요 없는 이들의 자유를 위해 시민들 대부분의 자유를 희생시키는 것’이라며 잘라 말한다. 물론 하비가 말하는 ‘계급 운동’이 공산혁명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 책의 논의는 시민들이 제각각 자신의 권리를 분명히 깨닫고 요구하라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지난 9월17일, 미국 뉴욕 주코티 공원에서는 청년 실업자들의 큰 시위가 있었다. 이들은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WallStreet)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들의 모습은 산업혁명 때 기계가 일자리를 빼앗았다며 기계를 부수었던 러다이트 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금융 엘리트들이 온 세상 부와 일자리를 앗아갔으니, 금융 시스템을 없애라는 주장처럼 들린다는 소리다. 러다이트 운동은 결국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문제를 일깨우고 복지 제도를 이끌어 내었다. 뉴욕 청년 백수들의 시위는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가는 모양새다. 젊은 그들의 목소리는 우리 시대에 어떤 희망을 안길까?
철학박사, 중동고 철학교사
timas@joongdong.org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
데이비드 하비 지음
최병두 옮김/한울아카데미 1935년,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새해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궁핍한 자는 자유인이 아니다.” 그는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소리 높여 외쳤다. 나라가 나서서 배고픈 서러움을 없애야 한다는 뜻이다. 이때부터 국가는 경제 발전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반면,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는 전혀 다른 소리를 한다. 국가는 잠자코 물러나 있어야 한다. 정부가 애먼 간섭을 할수록 경제는 꼬여만 갈 테다. 제아무리 뛰어난 관리도 시장만큼 수요와 공급을 잘 맞출 리 없다. 게다가 권력을 쥔 자들은 이익에 휘둘려 경제 흐름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기도 한다. 경제를 제대로 굴리려면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는 쪽이 낫다.
예를 들어보자. 신자유주의는 민영화(民營化)를 부르짖는다. 철도, 전기, 은행 등 국가가 꾸렸던 분야들은 민간으로 넘긴다. 그리고 외국돈이 자유롭게 오가도록 금융 장벽을 낮춘다. 빚에 허덕이는 나라에는 부채를 갚는 데 쓰라며 더 많은 돈을 빌려준다. 그러면서 돈이 드는 복지 제도는 줄이라고 요구한다. 그 결과, 가난한 나라의 재산은 부자 나라가 삼키기 좋은 모양새로 바뀌어 간다. 국가가 관리하던 알토란 같은 회사들도 부자들의 손에 떨어진다. 원래 투자를 잘못한 책임은 투자자에게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은 돈을 빌린 이들에게 탓을 돌린다. 부자 나라가 손해를 보는 대신, 갚아야 할 나라에 더 무거운 짐을 지우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신자유주의는 힘세고 돈 많은 이들이 유리한 세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이제 어려움에 부딪혔다. 벌어지는 빈부격차는 세계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가난한 이들은 더 이상 돈이 없다. 물건을 사지 못한다. 따라서 상품도 팔리지 않는다. 반면, 부자들은 넘치는 부를 부동산과 증권 등에 몰아넣었다. 당연히 땅값과 주식 값은 껑충 뛰었다. 하지만 주식과 부동산은 기대만큼 이익을 낳지 못한다. 주식과 부동산의 이익도 결국은 공장과 가게에서 나오는 탓이다. 물건이 팔리고 공장이 돌아가야 주식도 오르고 집세도 받지 않겠는가. 결국 주식과 부동산의 가격은 추락할 수밖에 없다. 한편, 가난한 이들은 줄어든 수입을 메우기 위해 빚을 진다. 나락으로 빠져드는 경제상황, 빚을 갚을 길은 점점 막막해진다. 그래서 세상 곳곳에서 빚은 늘어나고 재산 가치는 폭락한다. 하비가 짚어낸 현재 금융위기의 원인이다. 지금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하비는 ‘계급’을 끌어들인다. 신자유주의는 가진 자들에게 풍요로움을 몰아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렇다면 피해를 보는 이들도 뭉쳐야 하지 않을까? 가진 자들에게 맞서려면 힘을 모아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앞세운다. 그래서 사람들은 깜빡 속아 넘어갔다. 억압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은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자유란 ‘기업 활동의 자유’였을 뿐이다.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위해서라면, 정부는 언제든 신자유주의의 깃발을 내던져 버린다. 시장에 적극 뛰어든다는 뜻이다. 그래서 칼 폴라니는 신자유주의란 ‘더 많은 소득, 여유와 안전이 필요 없는 이들의 자유를 위해 시민들 대부분의 자유를 희생시키는 것’이라며 잘라 말한다. 물론 하비가 말하는 ‘계급 운동’이 공산혁명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 책의 논의는 시민들이 제각각 자신의 권리를 분명히 깨닫고 요구하라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지난 9월17일, 미국 뉴욕 주코티 공원에서는 청년 실업자들의 큰 시위가 있었다. 이들은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WallStreet)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들의 모습은 산업혁명 때 기계가 일자리를 빼앗았다며 기계를 부수었던 러다이트 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금융 엘리트들이 온 세상 부와 일자리를 앗아갔으니, 금융 시스템을 없애라는 주장처럼 들린다는 소리다. 러다이트 운동은 결국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문제를 일깨우고 복지 제도를 이끌어 내었다. 뉴욕 청년 백수들의 시위는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가는 모양새다. 젊은 그들의 목소리는 우리 시대에 어떤 희망을 안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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