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복 교사의 시사쟁점! 이 한권의 책
54. 천 하나의 고원 - 자유와 창조를 향한 삶이란?
54. 천 하나의 고원 - 자유와 창조를 향한 삶이란?
<천 하나의 고원>
이정우 지음·돌베개 [난이도 수준: 고2~고3]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세상을 보는 방식을 둘로 나눈다. ‘나무형’과 ‘뿌리줄기(리좀: Rhisome)형’이 그것이다. 나무는 질서가 잡혀 있다. 뿌리에서 줄기가 뻗어 나와 가지로 이어지고, 잎과 열매가 차례대로 달린다. 이처럼 ‘나무형’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 또한 체계가 있다. ‘나무형’에 따라 ‘나’를 설명해보자. 나는 인간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이다. 서울에 살며, ××고등학교 1학년이다. 이처럼 내가 누구인지 하는 꼬리표는 갈래를 따라 주어질 테다. 물론, 나에게는 여러 개의 꼬리표가 붙는다. 경주 김씨 무슨 파의 몇 대 손이며, 집안의 막내이다, 서울시 연합 축구 동아리 가운데 ××동 조기 축구회에 일원이다 등등.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이 꼬리표들이 일러 주곤 한다. “××고교 학생답게 행동해라”, “막둥이가 형한테 그러면 안 돼” 등등으로 말이다. 마치 ‘땅에 파인 홈을 따라가듯’ 나는 꼬리표가 가리키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손가락질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뿌리줄기형’으로 사는 세상은 이와 다르다. 뿌리줄기에는 체계가 없다. 뿌리에서 뿌리가 계속 뻗어나가는 까닭이다.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가려낼 수 없을 만큼, 뿌리는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간다. 따라서 갈래를 잡아 꼬리표를 붙이기는 어렵다. 따라서 할 수 있는 한, 모든 이들은 무엇도 될 수 있을 테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나무형’에서라면 남학생이 치마를 입기는 어렵다. 남학생에게는 대부분 치마라는 ‘드레스 코드’가 허락되지 않는 탓이다. 교사가 반바지 차림으로 교단에 서는 일 또한 생각조차 하기 어렵다. 교사들에게는 ‘엄숙단정’이라는 복장 규정이 있지 않던가. 그러나 ‘뿌리줄기형’에서는 어떨까?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누구도 주변에서 자신을 어떻게 보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건 하려 할 테다.
국가로서는 ‘뿌리줄기형’으로 사는 이들이 고깝기만 하다. 권력자들은 자신이 정한 규칙에 따라 시민들이 움직이기를 원한다. 정해진 꼬리표대로 살아가야 ‘관리’하기도 쉽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끊임없이 정해진 꼬리표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학생답게 행동해”, “다른 아이들처럼 똑같이 행동해라”라는 말이 고깝지 않게 들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에게는 항상 주어진 꼬리표보다 더 크고 넓은 가능성이 있다. ‘학생’이라는 이유로 참기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다. 권력자들은 시민들을 ‘나무형’ 아래 붙잡아 두려고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기에서 끊임없이 ‘탈주’하려고 든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나무형’은 억압과 독재를 낳는 부정적인 것으로, ‘뿌리줄기형’은 자유와 창조를 가져오는 긍정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철학자 이정우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잘라 말한다. 암세포를 예로 들어보자. 암세포의 움직임은 정상적인 세포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들은 제멋대로 증식하며 뻗어나간다. 그런데도 암세포를 바람직하다 할 수 있을까? 물론, 창조와 발전을 이끌려면 규칙과 질서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긍정적인 변화로 향하기 위해서는 따라야 할 것이 있다. 권력자들은 우리에게 ‘-이기’를 바란다. ‘학생-이기’, ‘직장인-이기’, ‘교사-이기’ 등등. 부품처럼 정해진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셈이다. 그러나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틀을 깨고 나가야 한다. 우리는 ‘학생-이기’를 넘어서 ‘자유인-되기’, ‘어른-되기’ 등을 쉴 새 없이 꿈꾸지 않던가. ‘-되기’(devenir)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에서 중심이 되는 생각이다. 인간뿐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기’를 넘어 ‘-되기’를 향해 나아간다. ‘사과’는 언제까지나 사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조금씩 썩어가며 ‘퇴비-되기’를 하고 있을 테다. 세상의 모든 것은 붙여진 꼬리표와 다른 무엇으로 ‘-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바람직하게 바뀌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정우 교수는 ‘소수자-되기’를 내세운다. 여성, 이주민 노동자 등 소외받고 어려운 사람들의 모습을 끊임없이 그리며 살라는 뜻인 듯싶다. 훌륭한 선생님을 꿈꾸며 노력하는 교사가 있다고 해 보자. 그는 ‘훌륭한 교사-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가 ‘훌륭한 교사’라고 스스로를 생각해 버린다면? 이미 ‘훌륭한 교사-이기’에 발전은 필요 없다고 여긴다면 어떨까? 그는 아마도 꼬장꼬장하고 노력하지 않는 권위적인 선생님이 되어 버릴 것이다. 진정 훌륭한 선생님은 ‘훌륭한 교사-되기’의 상태에 있다. 건강한 사회를 꾸리기 위한 ‘소수자-되기’도 마찬가지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 실업자’ 등, 진짜 소외받는 소수자가 되어서는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기 어려울 테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되기’, ‘청년 실업자-되기’의 자세로 살면 어떨까? 그늘에 있는 이들의 처지를 마음에 품고 살 때, 우리의 미래는 훨씬 바람직하고 살갑게 바뀌지 않을까?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가 죽었다. 시민들한테 맞아 죽은 비참한 최후였다. 그의 손에는 황금 권총이 들려 있었단다. 1969년 쿠데타를 일으켰던 28살의 청년 장교 카다피는 ‘북아프리카의 희망’과도 같았다. 자마히리야(인민주권)를 앞세우며 그는 사막을 푸른 낙원으로 바꾸기 위해 힘을 쏟았다. 하지만 모든 독재자는 ‘훌륭한 지도자-되기’를 그치는 순간 태어난다. 스스로를 ‘훌륭한 지도자’라고 여기는 권력자는 ‘시민의 적’이 되기 십상이다. 카다피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황금 권총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안광복 철학박사, 중동고 철학교사 timas@joongdong.org
이정우 지음·돌베개 [난이도 수준: 고2~고3]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세상을 보는 방식을 둘로 나눈다. ‘나무형’과 ‘뿌리줄기(리좀: Rhisome)형’이 그것이다. 나무는 질서가 잡혀 있다. 뿌리에서 줄기가 뻗어 나와 가지로 이어지고, 잎과 열매가 차례대로 달린다. 이처럼 ‘나무형’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 또한 체계가 있다. ‘나무형’에 따라 ‘나’를 설명해보자. 나는 인간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이다. 서울에 살며, ××고등학교 1학년이다. 이처럼 내가 누구인지 하는 꼬리표는 갈래를 따라 주어질 테다. 물론, 나에게는 여러 개의 꼬리표가 붙는다. 경주 김씨 무슨 파의 몇 대 손이며, 집안의 막내이다, 서울시 연합 축구 동아리 가운데 ××동 조기 축구회에 일원이다 등등.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이 꼬리표들이 일러 주곤 한다. “××고교 학생답게 행동해라”, “막둥이가 형한테 그러면 안 돼” 등등으로 말이다. 마치 ‘땅에 파인 홈을 따라가듯’ 나는 꼬리표가 가리키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손가락질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천 하나의 고원>
“학생답게 행동해”, “다른 아이들처럼 똑같이 행동해라”라는 말이 고깝지 않게 들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에게는 항상 주어진 꼬리표보다 더 크고 넓은 가능성이 있다. ‘학생’이라는 이유로 참기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다. 권력자들은 시민들을 ‘나무형’ 아래 붙잡아 두려고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기에서 끊임없이 ‘탈주’하려고 든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나무형’은 억압과 독재를 낳는 부정적인 것으로, ‘뿌리줄기형’은 자유와 창조를 가져오는 긍정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철학자 이정우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잘라 말한다. 암세포를 예로 들어보자. 암세포의 움직임은 정상적인 세포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들은 제멋대로 증식하며 뻗어나간다. 그런데도 암세포를 바람직하다 할 수 있을까? 물론, 창조와 발전을 이끌려면 규칙과 질서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긍정적인 변화로 향하기 위해서는 따라야 할 것이 있다. 권력자들은 우리에게 ‘-이기’를 바란다. ‘학생-이기’, ‘직장인-이기’, ‘교사-이기’ 등등. 부품처럼 정해진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셈이다. 그러나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틀을 깨고 나가야 한다. 우리는 ‘학생-이기’를 넘어서 ‘자유인-되기’, ‘어른-되기’ 등을 쉴 새 없이 꿈꾸지 않던가. ‘-되기’(devenir)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에서 중심이 되는 생각이다. 인간뿐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기’를 넘어 ‘-되기’를 향해 나아간다. ‘사과’는 언제까지나 사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조금씩 썩어가며 ‘퇴비-되기’를 하고 있을 테다. 세상의 모든 것은 붙여진 꼬리표와 다른 무엇으로 ‘-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바람직하게 바뀌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정우 교수는 ‘소수자-되기’를 내세운다. 여성, 이주민 노동자 등 소외받고 어려운 사람들의 모습을 끊임없이 그리며 살라는 뜻인 듯싶다. 훌륭한 선생님을 꿈꾸며 노력하는 교사가 있다고 해 보자. 그는 ‘훌륭한 교사-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가 ‘훌륭한 교사’라고 스스로를 생각해 버린다면? 이미 ‘훌륭한 교사-이기’에 발전은 필요 없다고 여긴다면 어떨까? 그는 아마도 꼬장꼬장하고 노력하지 않는 권위적인 선생님이 되어 버릴 것이다. 진정 훌륭한 선생님은 ‘훌륭한 교사-되기’의 상태에 있다. 건강한 사회를 꾸리기 위한 ‘소수자-되기’도 마찬가지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 실업자’ 등, 진짜 소외받는 소수자가 되어서는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기 어려울 테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되기’, ‘청년 실업자-되기’의 자세로 살면 어떨까? 그늘에 있는 이들의 처지를 마음에 품고 살 때, 우리의 미래는 훨씬 바람직하고 살갑게 바뀌지 않을까?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가 죽었다. 시민들한테 맞아 죽은 비참한 최후였다. 그의 손에는 황금 권총이 들려 있었단다. 1969년 쿠데타를 일으켰던 28살의 청년 장교 카다피는 ‘북아프리카의 희망’과도 같았다. 자마히리야(인민주권)를 앞세우며 그는 사막을 푸른 낙원으로 바꾸기 위해 힘을 쏟았다. 하지만 모든 독재자는 ‘훌륭한 지도자-되기’를 그치는 순간 태어난다. 스스로를 ‘훌륭한 지도자’라고 여기는 권력자는 ‘시민의 적’이 되기 십상이다. 카다피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황금 권총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안광복 철학박사, 중동고 철학교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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