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카페에서 시 읽기
안광복 교사의 시사쟁점! 이 한권의 책
난이도 수준 고2~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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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철학카페에서 시 읽기 - 부자가 되면 행복할까?
<철학카페에서 시 읽기> 김용규 지음웅진지식하우스
1958년과 1980년 사이, 미국의 에어컨 대수는 다섯 배 넘게 늘었다. 식기세척기는 일곱 배나 많아졌단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국민 전체의 1% 남짓만 컬러텔레비전을 가질 수 있었다. 1980년에는 무려 98%가 컬러텔레비전을 갖게 되었다. 이렇듯 살림살이는 몰라볼 만큼 좋아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해졌을까? 에어컨과 식기세척기, 컬러텔레비전을 갖추니, 예전보다 수십 배 행복해지던가? 물론 그렇지 않다. 선진국에서도 시민들 표정은 어둡고 자살도 많다. 반면, 가장 못사는 나라 가운데 하나인 부탄은 어떤가? 부탄 국민들의 행복 수준은 세계 1위란다.
사정이 이런데도 사람들은 더 많은 돈, 더 많은 풍요를 좇는다. 마치 부자가 아니어서 삶이 신산스럽다는 투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충분히 부자다. 대부분은 세끼 밥 먹고 등 따습게 입는 데 별문제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헛헛하고 불행할까? 철학자 김용규는 그 이유를 ‘후기자본주의’에서 찾는다. 생산량을 늘리는 데는 자본주의가 최고다. 자본주의가 지배한 지난 200여 년 동안, 배고픔과 가난함은 크게 줄어들었다. 이제는 어디서나 상품이 차고 넘쳐난다. 오히려 ‘소비 부족’이 문제일 정도다.
원래 자본주의는 근면, 성실, 절약을 강조한다. 그래야 생산량과 이익을 더 많이 챙기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인류를 가난과 배고픔에서 구해줄 ‘희망’이었다. 부자도 낭비를 몰랐고, 가난한 이들은 성실과 노력으로 현실을 이겨내려 했다. 지난 세기, ‘산업자본주의’의 바람직했던 모습이다. 하지만 후기자본주의는 다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시장’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긴다. 더 많이 쓰고 소비하라고 말이다.
유행(fashion)만 해도 그렇다. 유행은 쓸 만한 물건도 버리게 만든다. 사회 흐름에 뒤져서는 ‘엣지 없어’ 보이는 탓이다. 필요보다 욕망을 좇으니, 낭비가 이만저만 아니다. 새것 같은 물건들이 쓰레기가 되어 쏟아진다.
배고픔은 없앨 수 있다. 추위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고, ‘좋은 옷’을 입고 싶은 바람은 잠재울 길이 없다. 배고픔과 추위는 자연적인 욕구(need)다. 이는 절실함이 채워지면 가라앉는다. ‘더 맛있는 음식’, ‘더 좋은 옷’을 향한 욕망(want)은 어떤가? 이는 끝이 없다. 무엇을 가져도 항상 그 이상을 바라게 되는 탓이다. 후기자본주의는 욕구가 아닌 욕망을 뒤흔든다. 광고가 쏟아지고 온갖 자극이 판을 친다. 없던 욕심도 계속 만들어내는 식이다. 소비를 ‘창출’해야 공장을 계속 돌리지 않겠는가. 이러는 가운데, 세상 곳곳은 황량해진다. 부자 나라 사람들은 커다란 쇠고기 스테이크를 즐긴다. 이 때문에 나일강 주변과 벵골 삼각주의 4600만 명은 생활에 위협을 받는단다. 왜 그럴까? 소를 기르기 위해 숲을 베어내고 목장을 만드는 탓이다. 이럴수록 지구 온난화는 심해지고 해면(海面)의 높이도 올라간다. 땅이 낮은 나일강과 벵골 지역은 바다에 잠길지도 모른다. 잘사는 국가 시민들이 즐겁기 위해 못사는 나라 국민들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격이다. “우리가 너무 오만 방자해서, 함부로 산을 뚫고 바다를 메우고 땅속의 것 땅위의 것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걷어다 쓰는 바람에, 자연이 노해서 보복을 시작했다는 말에는 나도 동감이다./ 하지만 왜 하필 그들인가, 이 지구상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가장 순박하고 가장 욕심 없이 사는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인도 그리고 파키스탄을 골라 해일이 뒤덮거나 지진이 뒤흔들어 수십만 목숨을 빼앗고 병들이고 온 땅을 폐허로 만드는가?” 신경림의 시, <아, 막달라 마리아조차!>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뿐 아니다. 후기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삶을 황폐하게 한다. 사회학자들은 ‘어플루엔자’(Affluenza)라는 말로 현실을 비꼰다. 어플루엔자는 ‘풍요’(affluence)와 유행성 독감을 뜻하는 ‘인플루엔자’(Influenza)를 합친 말이다. 어플루엔자는 ‘고통스럽고 전염성이 있으며,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바라게 한다.’ 또한 ‘일을 무리하게 하게 되며 빚과 근심, 낭비를 하게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단다. 죽어라 일하고 소비해도 결코 행복에 이르지 못하는 우리 모습을 적절히 짚어주는 말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용규는 철학자다운 처방전을 내놓는다. “쾌락보다 더 행복을 주는 일을 하라!” 춤추러 가는 길에 우물에 빠진 아이가 눈에 띄었다. 아이를 구하려면 내가 입은 멋진 옷이 엉망이 될 테다. 그대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아이에게 달려가겠는가? 춤추러 가겠는가? 대부분은 아이 쪽을 택할 것이다. 춤추는 즐거움은 작은 행복이다. 반면, 생명을 구하는 일은 큰 행복이다. 일상의 소비도 마찬가지다. 나를 즐겁게 하는 소비와 세상을 편안하게 하는 소비, 그대라면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세상 전체를 머릿속에 넣고 살 때, 어떻게 벌고 써야 할지도 분명해질 테다. 지난 1일, 4개의 종합편성채널이 태어났다. 새로운 방송국들은 ‘미디어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며 환호하는 모양이다. 하긴, 볼거리가 많아지고 표현이 다양해진다는 점에서는, 늘어난 채널 수가 바람직해 보인다. 그러나 후기자본주의의 문제에 비추어 보면, 종편의 탄생이 마뜩잖게 다가온다. 늘어난 채널의 수입 대부분은 광고로 채워진다. 채널이 늘어난 만큼, 사람들은 더 많은 광고를 접하게 될 것이다. 광고는 욕구를 일깨우고 들끓게 한다. 소비는 낭비를 낳고, 낭비는 숱한 문제를 낳는다. 제대로 된 언론은 사회를 정도(正道)로 이끈다. 수입이 절박한 언론매체들이 과연 후기자본주의의 문제를 짚어줄 수 있을까? 1%를 오르내리는 형편없는 종편 시청률이 오히려 안도감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사브리핑: 종편 출범 이후 보름, 평균 시청률 0.4%지난 1일, 4개의 종합편성채널이 출범했다. 그러나 시청률은 1%에도 못 미치고 있다. 13일 기준, 시청률 조사기관 AGB닐슨에 따르면 채널A가 0.4%, JTBC 0.5%, MBN 0.3%, TV조선 0.2% 등 평균 시청률 0.4%를 넘지 못했다. 네 채널을 다 합쳐도 1%를 간신히 넘어섰을 뿐이다. 이에 따라 과다 광고비 책정 문제 등 숱한 논란이 일고 있다. 철학박사, 중동고 철학교사 timas@joongdong.org
배고픔은 없앨 수 있다. 추위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고, ‘좋은 옷’을 입고 싶은 바람은 잠재울 길이 없다. 배고픔과 추위는 자연적인 욕구(need)다. 이는 절실함이 채워지면 가라앉는다. ‘더 맛있는 음식’, ‘더 좋은 옷’을 향한 욕망(want)은 어떤가? 이는 끝이 없다. 무엇을 가져도 항상 그 이상을 바라게 되는 탓이다. 후기자본주의는 욕구가 아닌 욕망을 뒤흔든다. 광고가 쏟아지고 온갖 자극이 판을 친다. 없던 욕심도 계속 만들어내는 식이다. 소비를 ‘창출’해야 공장을 계속 돌리지 않겠는가. 이러는 가운데, 세상 곳곳은 황량해진다. 부자 나라 사람들은 커다란 쇠고기 스테이크를 즐긴다. 이 때문에 나일강 주변과 벵골 삼각주의 4600만 명은 생활에 위협을 받는단다. 왜 그럴까? 소를 기르기 위해 숲을 베어내고 목장을 만드는 탓이다. 이럴수록 지구 온난화는 심해지고 해면(海面)의 높이도 올라간다. 땅이 낮은 나일강과 벵골 지역은 바다에 잠길지도 모른다. 잘사는 국가 시민들이 즐겁기 위해 못사는 나라 국민들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격이다. “우리가 너무 오만 방자해서, 함부로 산을 뚫고 바다를 메우고 땅속의 것 땅위의 것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걷어다 쓰는 바람에, 자연이 노해서 보복을 시작했다는 말에는 나도 동감이다./ 하지만 왜 하필 그들인가, 이 지구상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가장 순박하고 가장 욕심 없이 사는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인도 그리고 파키스탄을 골라 해일이 뒤덮거나 지진이 뒤흔들어 수십만 목숨을 빼앗고 병들이고 온 땅을 폐허로 만드는가?” 신경림의 시, <아, 막달라 마리아조차!>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뿐 아니다. 후기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삶을 황폐하게 한다. 사회학자들은 ‘어플루엔자’(Affluenza)라는 말로 현실을 비꼰다. 어플루엔자는 ‘풍요’(affluence)와 유행성 독감을 뜻하는 ‘인플루엔자’(Influenza)를 합친 말이다. 어플루엔자는 ‘고통스럽고 전염성이 있으며,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바라게 한다.’ 또한 ‘일을 무리하게 하게 되며 빚과 근심, 낭비를 하게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단다. 죽어라 일하고 소비해도 결코 행복에 이르지 못하는 우리 모습을 적절히 짚어주는 말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용규는 철학자다운 처방전을 내놓는다. “쾌락보다 더 행복을 주는 일을 하라!” 춤추러 가는 길에 우물에 빠진 아이가 눈에 띄었다. 아이를 구하려면 내가 입은 멋진 옷이 엉망이 될 테다. 그대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아이에게 달려가겠는가? 춤추러 가겠는가? 대부분은 아이 쪽을 택할 것이다. 춤추는 즐거움은 작은 행복이다. 반면, 생명을 구하는 일은 큰 행복이다. 일상의 소비도 마찬가지다. 나를 즐겁게 하는 소비와 세상을 편안하게 하는 소비, 그대라면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세상 전체를 머릿속에 넣고 살 때, 어떻게 벌고 써야 할지도 분명해질 테다. 지난 1일, 4개의 종합편성채널이 태어났다. 새로운 방송국들은 ‘미디어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며 환호하는 모양이다. 하긴, 볼거리가 많아지고 표현이 다양해진다는 점에서는, 늘어난 채널 수가 바람직해 보인다. 그러나 후기자본주의의 문제에 비추어 보면, 종편의 탄생이 마뜩잖게 다가온다. 늘어난 채널의 수입 대부분은 광고로 채워진다. 채널이 늘어난 만큼, 사람들은 더 많은 광고를 접하게 될 것이다. 광고는 욕구를 일깨우고 들끓게 한다. 소비는 낭비를 낳고, 낭비는 숱한 문제를 낳는다. 제대로 된 언론은 사회를 정도(正道)로 이끈다. 수입이 절박한 언론매체들이 과연 후기자본주의의 문제를 짚어줄 수 있을까? 1%를 오르내리는 형편없는 종편 시청률이 오히려 안도감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사브리핑: 종편 출범 이후 보름, 평균 시청률 0.4%지난 1일, 4개의 종합편성채널이 출범했다. 그러나 시청률은 1%에도 못 미치고 있다. 13일 기준, 시청률 조사기관 AGB닐슨에 따르면 채널A가 0.4%, JTBC 0.5%, MBN 0.3%, TV조선 0.2% 등 평균 시청률 0.4%를 넘지 못했다. 네 채널을 다 합쳐도 1%를 간신히 넘어섰을 뿐이다. 이에 따라 과다 광고비 책정 문제 등 숱한 논란이 일고 있다. 철학박사, 중동고 철학교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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