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조종자들>
안광복 교사의 시사쟁점! 이 한권의 책
61. <생각 조종자들> - 보고 싶은 것과 봐야 할 것들
<생각 조종자들>
엘리 프레이저 지음이현숙·이정태 옮김, 알키 2004년 칠레의 신문 <울티마스 노티시아스>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기사를 신문에 올릴지 말지를 ‘클릭 수’로 결정한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클릭한 기사는 지면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인다. 클릭 수 적은 기사는 구석으로 옮겨질 테다. 클릭이 드문 기사는 아예 내려버린다. 반면, <뉴욕 타임스>는 다른 논리를 따른다. 신문의 1면 머리기사는 아주 중요하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는 까닭이다. <뉴욕 타임스>는 1면 머리기사를 ‘여론’에 따라 정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보다, ‘보아야 할 것’을 전하는 것이 언론의 본분이라 믿기 때문이란다.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 피해’와 ‘아이돌 스타의 스캔들’ 중에서, 사람들은 어느 쪽에 더 관심을 가질까? 골치 아픈 소식을 즐겨 듣는 이는 많지 않다. 자신과 별 상관없어 보이는 기사에는 더 끌리지 않을 테다. 하지만 사회가 건강하려면 시민들이 ‘중요하지만 거북한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이렇게 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이런 잣대로 볼 때, 주요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모습은 걱정스럽다. 이미 대세(大勢)는 <울티마스 노티시아스> 쪽으로 기운 듯하다. 포털의 대문에는 연예인들의 가십성 기사가 묵직한 정치·경제 기사와 함께 올라오곤 한다. 과연 아무 문제 없을까? 온라인 시민단체 운동가인 엘리 프레이저는 인터넷 세상을 심각하게 바라본다. 인터넷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소통을 기대했다. 지금의 현실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사람들은 되레 끼리끼리 뭉친다. 상대편 이야기를 듣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왜 그럴까? 엘리 프레이저는 그 까닭을 ‘필터 버블’(Filter Bubble)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보자. 인터넷 책방에 로그인하고 들어가 보라. 책방은 사람마다 다른 화면을 보여준다. 내가 클릭할 때마다, 인터넷 책방은 내가 눈여겨본 페이지들을 차곡차곡 쌓아놓았을 테다. 그러곤 내가 좋아할 만한 책들을 눈앞에 펼쳐 놓는다. 주요 검색 엔진들도 다르지 않다. 내가 무엇을 클릭했는지는 서버에 고스란히 저장된다. 검색 프로그램은 쌓인 데이터로 내가 무엇에 관심 있는지, 어떤 성격인지를 가늠한다. 내가 혹할 만한 소식을 눈앞에 풀어놓기 위해서다. 그래서 나는 원래 관심이 있었던 분야를 더 많이 보게 될 테다.
인터넷에서 맺는 인간관계도 다르지 않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나는 호감 가는 이들의 이야기만 들을 수 있다. 관심이 없는 사람은? 차단해 버리면 그만이다. 게다가 에스엔에스들은 나와 비슷한 사람이나 친구가 될 만한 이들을 추천해 주기까지 한다. 나 몰래 나의 정보를 촘촘히 분석한 결과다. 이렇듯 우리는 정보를 나에게 맞게 걸러주는 거대한 필터를 통해서만 세상을 만나는 셈이다. ‘필터 버블’이란 내가 좋아할 만한 정보만 솎아내는 정보 검색 시스템을 말한다. 필터 버블이 촘촘해질수록, 내가 세상을 보는 눈도 좁아진다. 그렇다면 로그인하지 않고 검색을 하면 어떨까? 검색 사이트들이 내 개인정보를 알지 못하도록 말이다. 안타깝게도, 검색 엔진 회사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내가 로그인하도록 갖은 ‘혜택’을 늘어놓는다. 이메일에 문자 대화 서비스, 클라우드 저장 창고에 스프레드시트와 워드 프로그램까지 안긴다. 로그인만 하면 모두 공짜다. 컴퓨터를 요긴하게 쓰려면 로그인할 수밖에 없는 구도다. 프레이저에 따르면, 검색 엔진들로서는 수집된 개인정보는 엄청난 수입이 된다. 기업들은 늘 소비자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검색 엔진들이 수집한 데이터는 시민 한명 한명에 대한 요긴한 ‘마케팅 정보’가 될 테다. 또한, 정치가들도 표 가진 이들이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한편, 나는 검색 엔진들이 원하는 인간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예컨대 미국의 모병(募兵) 사이트는 군대에 갈 만한 이들을 친구들 성향으로 추려낸단다. 어떤 이의 친구들 중 3~4명이 군에 관심을 보였다면, 그 사람도 군대 갈 확률이 높다고 짐작하는 식이다. 이런 논리를 정치 홍보에 적용해 보자. 내 친구들이 보수 쪽 정치인에 관심이 많으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보수 성향의 정치 사이트에 자주 들어간다면? 검색 엔진은 나도 비슷한 부류라고 짐작할지 모른다. 이럴 때, 나에게는 한쪽의 정치적 주장만 계속해서 자주 보일 수 있다. 생각은 보고 듣는 것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다. 나는 자신도 모르는 채, 누군가가 기대하는 대로 변해갈지도 모른다. 주요 언론사 몇 개가 여론을 좌지우지하던 때가 있었다. 인터넷은 ‘언론 독재’를 무너뜨렸다. 더 이상 사람들은 언론의 말만 따르지 않는다. 반면, 인터넷은 또 다른 독재를 불러오고 있다. 필터 버블을 이용하면,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맞춤형 세뇌’까지 가능한 세상이다. 물론, 구글 같은 큰 검색 엔진들은 이런 걱정에 펄쩍 뛸지 모르겠다. (심지어 구글의 모토는 ‘사악해지지 말자’(Don't be Evil)이다.) 그들은 사용자 개인정보를 보관만 할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하지만 세상은 할 수 있는 것을 언제까지나 하지 않는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에스엔에스 선거운동 금지’가 위헌 판정을 받았다. 이에 따라, 에스엔에스를 이용한 정치 홍보가 활발해질 것이라 한다. 프레이저는 사람들 사이의 연대를 ‘껴안기’(bonding)와 ‘연결하기’(bridging)로 나눈다. 껴안기는 비슷한 부류끼리 뭉치는 모습이다. 연결하기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끼리 어깨동무하는 것을 가리킨다. ‘껴안기’는 집단 이기주의를 낳기 쉽다. 그러나 ‘연결하기’는 타협과 대화를 낳는다. 에스엔에스가 우리 사회를 ‘껴안기’로 몰고 갈지, ‘연결하기’로 이끌지 지켜볼 일이다. 철학박사, 중동고 철학교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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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프레이저 지음이현숙·이정태 옮김, 알키 2004년 칠레의 신문 <울티마스 노티시아스>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기사를 신문에 올릴지 말지를 ‘클릭 수’로 결정한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클릭한 기사는 지면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인다. 클릭 수 적은 기사는 구석으로 옮겨질 테다. 클릭이 드문 기사는 아예 내려버린다. 반면, <뉴욕 타임스>는 다른 논리를 따른다. 신문의 1면 머리기사는 아주 중요하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는 까닭이다. <뉴욕 타임스>는 1면 머리기사를 ‘여론’에 따라 정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보다, ‘보아야 할 것’을 전하는 것이 언론의 본분이라 믿기 때문이란다.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 피해’와 ‘아이돌 스타의 스캔들’ 중에서, 사람들은 어느 쪽에 더 관심을 가질까? 골치 아픈 소식을 즐겨 듣는 이는 많지 않다. 자신과 별 상관없어 보이는 기사에는 더 끌리지 않을 테다. 하지만 사회가 건강하려면 시민들이 ‘중요하지만 거북한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이렇게 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이런 잣대로 볼 때, 주요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모습은 걱정스럽다. 이미 대세(大勢)는 <울티마스 노티시아스> 쪽으로 기운 듯하다. 포털의 대문에는 연예인들의 가십성 기사가 묵직한 정치·경제 기사와 함께 올라오곤 한다. 과연 아무 문제 없을까? 온라인 시민단체 운동가인 엘리 프레이저는 인터넷 세상을 심각하게 바라본다. 인터넷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소통을 기대했다. 지금의 현실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사람들은 되레 끼리끼리 뭉친다. 상대편 이야기를 듣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왜 그럴까? 엘리 프레이저는 그 까닭을 ‘필터 버블’(Filter Bubble)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보자. 인터넷 책방에 로그인하고 들어가 보라. 책방은 사람마다 다른 화면을 보여준다. 내가 클릭할 때마다, 인터넷 책방은 내가 눈여겨본 페이지들을 차곡차곡 쌓아놓았을 테다. 그러곤 내가 좋아할 만한 책들을 눈앞에 펼쳐 놓는다. 주요 검색 엔진들도 다르지 않다. 내가 무엇을 클릭했는지는 서버에 고스란히 저장된다. 검색 프로그램은 쌓인 데이터로 내가 무엇에 관심 있는지, 어떤 성격인지를 가늠한다. 내가 혹할 만한 소식을 눈앞에 풀어놓기 위해서다. 그래서 나는 원래 관심이 있었던 분야를 더 많이 보게 될 테다.
인터넷에서 맺는 인간관계도 다르지 않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나는 호감 가는 이들의 이야기만 들을 수 있다. 관심이 없는 사람은? 차단해 버리면 그만이다. 게다가 에스엔에스들은 나와 비슷한 사람이나 친구가 될 만한 이들을 추천해 주기까지 한다. 나 몰래 나의 정보를 촘촘히 분석한 결과다. 이렇듯 우리는 정보를 나에게 맞게 걸러주는 거대한 필터를 통해서만 세상을 만나는 셈이다. ‘필터 버블’이란 내가 좋아할 만한 정보만 솎아내는 정보 검색 시스템을 말한다. 필터 버블이 촘촘해질수록, 내가 세상을 보는 눈도 좁아진다. 그렇다면 로그인하지 않고 검색을 하면 어떨까? 검색 사이트들이 내 개인정보를 알지 못하도록 말이다. 안타깝게도, 검색 엔진 회사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내가 로그인하도록 갖은 ‘혜택’을 늘어놓는다. 이메일에 문자 대화 서비스, 클라우드 저장 창고에 스프레드시트와 워드 프로그램까지 안긴다. 로그인만 하면 모두 공짜다. 컴퓨터를 요긴하게 쓰려면 로그인할 수밖에 없는 구도다. 프레이저에 따르면, 검색 엔진들로서는 수집된 개인정보는 엄청난 수입이 된다. 기업들은 늘 소비자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검색 엔진들이 수집한 데이터는 시민 한명 한명에 대한 요긴한 ‘마케팅 정보’가 될 테다. 또한, 정치가들도 표 가진 이들이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한편, 나는 검색 엔진들이 원하는 인간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예컨대 미국의 모병(募兵) 사이트는 군대에 갈 만한 이들을 친구들 성향으로 추려낸단다. 어떤 이의 친구들 중 3~4명이 군에 관심을 보였다면, 그 사람도 군대 갈 확률이 높다고 짐작하는 식이다. 이런 논리를 정치 홍보에 적용해 보자. 내 친구들이 보수 쪽 정치인에 관심이 많으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보수 성향의 정치 사이트에 자주 들어간다면? 검색 엔진은 나도 비슷한 부류라고 짐작할지 모른다. 이럴 때, 나에게는 한쪽의 정치적 주장만 계속해서 자주 보일 수 있다. 생각은 보고 듣는 것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다. 나는 자신도 모르는 채, 누군가가 기대하는 대로 변해갈지도 모른다. 주요 언론사 몇 개가 여론을 좌지우지하던 때가 있었다. 인터넷은 ‘언론 독재’를 무너뜨렸다. 더 이상 사람들은 언론의 말만 따르지 않는다. 반면, 인터넷은 또 다른 독재를 불러오고 있다. 필터 버블을 이용하면,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맞춤형 세뇌’까지 가능한 세상이다. 물론, 구글 같은 큰 검색 엔진들은 이런 걱정에 펄쩍 뛸지 모르겠다. (심지어 구글의 모토는 ‘사악해지지 말자’(Don't be Evil)이다.) 그들은 사용자 개인정보를 보관만 할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하지만 세상은 할 수 있는 것을 언제까지나 하지 않는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에스엔에스 선거운동 금지’가 위헌 판정을 받았다. 이에 따라, 에스엔에스를 이용한 정치 홍보가 활발해질 것이라 한다. 프레이저는 사람들 사이의 연대를 ‘껴안기’(bonding)와 ‘연결하기’(bridging)로 나눈다. 껴안기는 비슷한 부류끼리 뭉치는 모습이다. 연결하기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끼리 어깨동무하는 것을 가리킨다. ‘껴안기’는 집단 이기주의를 낳기 쉽다. 그러나 ‘연결하기’는 타협과 대화를 낳는다. 에스엔에스가 우리 사회를 ‘껴안기’로 몰고 갈지, ‘연결하기’로 이끌지 지켜볼 일이다. 철학박사, 중동고 철학교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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