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에 대한 여러 학설이 있는데,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는 그중 세 가지가 실려 있다. 본디 순선(純善)한 성품을 타고난다고 보는 성선설(性善說), 본성이나 감성적 욕구의 악함을 가정하는 성악설(性惡說), 선악이 인간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선택과 판단이나 환경에 달려 있다고 보는 성무선악설(性無善惡設) 등이다. 이들 학설의 공통점은 선과 악의 대립구도로 본성을 탐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과 악의 갈등을 다룬 문학작품 또한 여럿 있는 데, 그중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일종의 실험을 소재로 한다. 이 실험은 본성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며 그 둘이 분리될 수 있다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지킬은 이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갖가지 약품을 사용해 보는 데, 결국 선한 자신과 악한 자신을 분리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분리된 선과 악의 본성으로 생존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지를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서 선은 쾌활함, 근면성, 절제심,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노력 등으로 구체화된다. 반면 인간의 치명적인 부분이라 명명한 악은 기형과 타락, 유희에의 탐닉, 오만함 등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런 특성이 과연 완전히 독립적이며, 절대적으로 정의되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쾌활함’은 상황과 정도에 따라 유쾌함이 될 수도, 경박함이 될 수도 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가장 부지런한 말(馬)인 복서의 정직과 근면은 스퀼러의 탐욕에 희생되는 덕성이다. 지나친 절제는 경직된 삶을 이끌고,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또다른 타인의 희생이 동반되기도 한다.
악 또한 마찬가지다 기형은 정상과 대조되는 모양인데, 정상은 문화마다 다르게 정의되므로 기형 또한 확정할 수 없다. 타락 또한 제각기 다른 가치관에 따라 그 결정 수위가 달라질 수 있다. 유희에 탐닉하는 것은 과연 어디까지인지 모호하다.
결국 선과 악은 정도와 상황, 가치관 등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 개념이며 모든 인간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을 고려하면 순수 악을 정제하고자 했던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성공을 고백한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어두운 욕망을 분리된 다른 존재의 것으로 돌리고, 지킬의 모습으로는 여전히 위선의 세계에 머물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중인격>의 저자 비벌리 엔젤은 순간적으로 극심한 감정 변화를 보이거나, 상대와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행동을 하거나, 겉과 속이 다른 이중생활을 하는 경우 등에 ‘지킬과 하이드 증후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이 증후군을 극복하는 방법은 상반된 힘이 개인의 내면에 만들어내는 긴장 상태를 받아들이는 것이라 한다. 내면의 이기적이고 잔인한 속성을 인정하고 직시하는 가운데 그런 측면을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서도 작가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팠을 것이다. 지킬과 하이드의 집은 매우 다른 모습이다. 하이드의 집은 다른 집들과 떨어져 있으며, 오랫동안 더럽게 방치된 느낌을 준다. 문에는 초인종도, 문을 두드리는 쇠 장식도 없다. 하이드의 집은 단절과 고립, 외면 등을 상징한다. 반면 지킬의 집은 부와 안락한 분위기를 흠씬 풍기는 저택이다. 벽난로가 온기를 뿜어내는 넓은 홀은 방문객에게도 편안한 장소다. 지킬의 집은 정돈되어 있고 청결하며 평화롭다. 지킬과 하이드의 전혀 다른 외모처럼 이들이 사는 집의 모양도 대조적이다. 그런데 지킬과 하이드는 한 사람이고, 두 집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이드는 만들어진 괴물이 아니라, 지킬 스스로 냉대한 자신의 일부분이었던 것이다.
한 사람에 내재한 선과 악의 분리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이다. 지킬이 자의적으로 악한 본성을 분리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반쪼가리 자작>의 주인공 메다르도는 참전중 대포에 맞아 몸이 정확히 절반으로 분리된다. 오른쪽 절반은 악한 메다르도, 왼쪽 절반은 선한 메다르도로 쪼개진 것이다.
<반쪼가리 자작>에서 선은 남이 어려울 때 도와주고 좋은 충고로 폭력과 범죄를 막는 성품으로, 악은 잔인함과 포악함 등 억제해야 할 열정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저자는 선함에만 가치를 두지 않는다. 선한 메다르도는 장인(匠人) 피에트로키오도에게 기계를 주문하는데, 부드러운 음악을 연주하는 오르간, 가난한 사람을 위해 밀가루를 빻는 물방아, 빵을 구울 수 있는 오븐의 구실을 모두 할 수 있도록 만들어달라고 한다. 그러나 피에트로키오도는 선한 메다르도의 주문대로 기계를 만들지 못한다. 여러 사람에게 두루 이로운 선함이 현실에서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저자의 회의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한편 이야기의 말미에 ‘비인간적인 사악함과 그와 마찬가지인 비인간적인 덕성 사이에서 자신을 상실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문장을 덧붙임으로써 선이든 악이든 한쪽으로 쏠리게 되면 인간다움을 잃게 된다는 작가의 메시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악한 메다르도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반쪽으로 자르는 습성을 갖고 있는데, 이런 분리 행동을 악의 일부로 보여줌으로써 선과 악을 나누는 데 따르는 위험 또한 암시한다.
반으로 쪼개졌던 자작은 결투 끝에 다시 한 몸으로 합쳐지는데, 저자는 이때의 메다르도를 사악함과 선함이 혼합된 ‘온전한’ 인간이라고 적는다. 선의 가치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분리된 선은 불완전하며 악과 공존함으로써만 그 의미가 드러난다는 저자의 의중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 껴울리다는 공명(共鳴)하다는 뜻입니다.
한겨레교육 강사, <통합 논술 교과서>·<유형별 논술 교과서> 공저자
<한겨레 인기기사>
■ 김병관, 무기상 자문료 2억 받아…부인은 군납회사 주식 투자
■ 김종훈 장관 후보자 며칠전에야 ‘한국 국적’ 회복
■ 박근혜 당선인 ‘노인 임플란트 공약’도 대폭 후퇴
■ 마약에 손댄것처럼…클릭에 빠져들었다
■ TV 앞에서 사라지는 50대 아저씨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