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 기념관의 내부 모습.
여행작가 엄마와 떠나는 공부여행
55. 유관순 열사 생가·기념관
55. 유관순 열사 생가·기념관
삼일절이 다가오고 있다. 요즘 아이들에게 ‘조국’이니 ‘독립’이니 하는 단어들은 생경스럽겠지만 유관순을 모르는 아이들은 없을 것이다. 유관순 열사의 흔적과 기상을 만날 수 있는 충남 천안으로 향하며 삼일절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유관순(柳寬順, 1902~1920)은 아버지 유중권(柳重權), 어머니 이소제(李少梯)의 3남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가산을 털어 흥호(興湖)학교를 세울 만큼 계몽 운동가였고 민족주의자였다. 유관순이 이화학당에 다니고 있을 때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대두됨에 따라 자주독립의 희망이 움트며 독립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임시 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은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사촌언니와 함께 귀향해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만세운동을 전했다.
복원된 유관순의 생가 안방에서는 유관순의 부모님과 숙부 등 여러 사람이 모여 회의하고 건넌방에서는 유관순 열사가 동생들과 태극기를 만드는 모형이 있다. 산모퉁이를 돌아 자리한 유관순 열사 기념관(www.yugwansun.com)에는 유관순 동상과 함께 모형, 전시물, 육성 증언 등이 당시의 상황을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지척에는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아우내 장터가 있다. 당시의 격렬한 만세운동으로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유관순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고 집은 불탔으며 유관순은 체포되었다.
아우내 장터에서 아이들과 점심을 먹으며 생가와 기념관에서 보았던 내용들을 되뇌어 보자. 지금과 다른 1919년 당시의 태극기 모양, 아우내 장터에서 체포된 뒤 자신이 주동자라며 다른 사람을 석방하라던 유관순 열사의 기개,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부르던 서대문 형무소 기간,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의 장독(杖毒)으로 18살 꽃다운 나이에 순국한 유관순 열사… 그리고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온 힘을 다해 독립을 부르짖던 유관순 열사 같은 분이 있었기에 가능했음과 독립국가의 의미 등 다소 묵직한 주제의 토론시간을 가져보자.
글·사진 이동미
<여행작가 엄마와 떠나는 공부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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