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ㅣ문학과 지성사
김수연의 책과 껴울리는 시간
열쇳말-탐구
열쇳말-탐구
난이도 수준
중2~고1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ㅣ문학과 지성사
<필경사 바틀비> 허먼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문학동네 ‘할 수 있다.’ 의기소침한 이에게 용기를 주는 말로 종종 사용된다. 그러나 능력이나 성과에 대한 과도한 긍정은 결국 극도의 피로와 탈진을 낳는다. ‘피로사회’는 이처럼 과도한 긍정성에 사로잡힌 개인이 자기 스스로를 착취하는 사회현상에서 비롯한 말이다. 이때의 피로는 만족스런 노동 이후에 찾아오는 평화롭고 나른한 휴식과 거리가 멀다. 더 이상 파낼 수 없는 지점까지 자신의 능력을 긁어내어 자아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소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대사회를 대표하는 질병으로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 등을 든다. 모두 긍정성 과잉과 자기착취라는 피로사회의 특징과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 질병은 바이러스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에서 비롯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울증은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나타나고,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는 다양한 과업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재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주의가 산만해지는 형태로 표출된다. 소진증후군은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다 사용하여 고갈된 상태에 대한 병리적 진단이다. 피로사회의 개인은 외부의 누군가에 의해 직접적으로 강제되지 않는다. 겉보기에 자유롭다. 그들의 과업은 어떤 누군가가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목표는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기대치가 올라간다. 때문에 성과주체의 내면에서는 자유와 강제가 하나가 되는 모순이 나타난다. 왜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드는가. 저자는 이러한 소진증후군의 원인을 긍정성의 과잉에서 찾는다. 성과를 향한 압박은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자발적으로 자신을 독려하고, 성과를 끌어내는 사이 조금씩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점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할을 동시에 떠맡게 된다고 한다. 피로사회의 개인은 근대 규율사회의 개인과 구별된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의 주체는 자기 바깥의 비정상적인 것들과의 대비로써 정상을 개념화한다고 설명했다.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등은 비정상을 분리하는 공간이 된다. 각 사회에 적합한 인간은 군대나 학교, 공장 등에서 길러져 나온다. 그들을 특정한 모습으로 규격화하기 위해 규율이 적용된다. 이때 규율은 외부에서 부과된 것이며, 규율의 준수는 외부의 시선에 의해 감시된다. 규율사회에서 감시를 내면화한 개인이 복종적 주체로 존재한다면, 21세기의 피로사회에서 개인은 경쟁의 논리를 내면화한 성과주체로 살아간다. 이들에게 규율은 이미 내재해 있고, 외부의 시선이 없어도 스스로를 착취한다. 누가 움직이라고 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활동하지 않고는 못 견디기 때문에 움직인다. 그 활동이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결국 과도한 몰아붙임의 끝은 절망과 깊은 무력감이다. 저자는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에게서 이와 같은 깊은 무력감을 발견한다. 바틀비는 법률 문서를 베껴 쓰는 일을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쉬지도 않고 필사에 전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선언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바틀비는 필사하는 일도, 필사본을 검토하는 일도, 우체국에 가서 우편물을 확인하는 일도 모두 거부했다. 고용주인 변호사의 질문에도 같은 대답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바틀비의 대사 “I would prefer not to.”는 다양하게 해석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공진호 역),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한기욱 역), “하고 싶지 않습니다”(김세미 역),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김태환 역) 등이다. 공진호의 번역은 ‘선택’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런데 ‘하지 않음’을 선택했다고 보고, 바틀비의 행위를 저항의 몸짓으로 평가하는 입장 안에도 여러 갈래가 있다. 반복된 노동에 대한 소극적 저항,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 기계의 부속품처럼 취급되는 근대적 인간의 대안으로 보는 관점 등이다. <피로사회>에서는 병리학적 차원에서 바틀비를 이해한다. 바틀비는 세계와 연관성을 잃고 절망에 압도당한 상태라는 것이다. 한병철은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의 존재신학적 해석은 병리학적 측면을 완전히 도외시했다며 비판한다. 아감벤은 바틀비가 창조하지 않음으로써 절대적 잠재력의 상태에 진입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한병철은 이러한 아감벤의 해석은 바틀비가 필사뿐만 아니라 모든 일을 하지 않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바틀비는 근대에 속한 사람으로 자기착취의 결과로서 극도의 피로에 이른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메시아적 희망을 이야기하는 자가 아니라 좌절과 절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피로사회의 병리와 연결된다. 병리학적 진단을 잘 이해하지 못한 독자에게도 이런 해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분석의 틀을 내려놓고 <필경사 바틀비>를 그야말로 한 사람이 살다 죽은 이야기로 읽으면 가장 먼저 드는 느낌은 ‘절망’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하고 몸에 생기가 넘칠 때 바틀비 이야기를 읽어 보자. 그리고 몸이 많이 아플 때, 더 이상은 무언가를 하고자 해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밀려들 때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읽어 보자. 공감의 넓이와 깊이가 확연히 다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좌절과 절망의 순간 바틀비는 한층 이웃처럼 느껴진다. ※ 껴울리다는 공명(共鳴)하다는 뜻입니다. 한겨레교육 강사, <통합 논술 교과서>·<유형별 논술 교과서> 공저자
중2~고1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ㅣ문학과 지성사
<필경사 바틀비> 허먼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문학동네 ‘할 수 있다.’ 의기소침한 이에게 용기를 주는 말로 종종 사용된다. 그러나 능력이나 성과에 대한 과도한 긍정은 결국 극도의 피로와 탈진을 낳는다. ‘피로사회’는 이처럼 과도한 긍정성에 사로잡힌 개인이 자기 스스로를 착취하는 사회현상에서 비롯한 말이다. 이때의 피로는 만족스런 노동 이후에 찾아오는 평화롭고 나른한 휴식과 거리가 멀다. 더 이상 파낼 수 없는 지점까지 자신의 능력을 긁어내어 자아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소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대사회를 대표하는 질병으로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 등을 든다. 모두 긍정성 과잉과 자기착취라는 피로사회의 특징과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 질병은 바이러스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에서 비롯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울증은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나타나고,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는 다양한 과업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재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주의가 산만해지는 형태로 표출된다. 소진증후군은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다 사용하여 고갈된 상태에 대한 병리적 진단이다. 피로사회의 개인은 외부의 누군가에 의해 직접적으로 강제되지 않는다. 겉보기에 자유롭다. 그들의 과업은 어떤 누군가가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목표는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기대치가 올라간다. 때문에 성과주체의 내면에서는 자유와 강제가 하나가 되는 모순이 나타난다. 왜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드는가. 저자는 이러한 소진증후군의 원인을 긍정성의 과잉에서 찾는다. 성과를 향한 압박은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자발적으로 자신을 독려하고, 성과를 끌어내는 사이 조금씩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점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할을 동시에 떠맡게 된다고 한다. 피로사회의 개인은 근대 규율사회의 개인과 구별된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의 주체는 자기 바깥의 비정상적인 것들과의 대비로써 정상을 개념화한다고 설명했다.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등은 비정상을 분리하는 공간이 된다. 각 사회에 적합한 인간은 군대나 학교, 공장 등에서 길러져 나온다. 그들을 특정한 모습으로 규격화하기 위해 규율이 적용된다. 이때 규율은 외부에서 부과된 것이며, 규율의 준수는 외부의 시선에 의해 감시된다. 규율사회에서 감시를 내면화한 개인이 복종적 주체로 존재한다면, 21세기의 피로사회에서 개인은 경쟁의 논리를 내면화한 성과주체로 살아간다. 이들에게 규율은 이미 내재해 있고, 외부의 시선이 없어도 스스로를 착취한다. 누가 움직이라고 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활동하지 않고는 못 견디기 때문에 움직인다. 그 활동이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결국 과도한 몰아붙임의 끝은 절망과 깊은 무력감이다. 저자는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에게서 이와 같은 깊은 무력감을 발견한다. 바틀비는 법률 문서를 베껴 쓰는 일을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쉬지도 않고 필사에 전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선언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바틀비는 필사하는 일도, 필사본을 검토하는 일도, 우체국에 가서 우편물을 확인하는 일도 모두 거부했다. 고용주인 변호사의 질문에도 같은 대답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바틀비의 대사 “I would prefer not to.”는 다양하게 해석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공진호 역),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한기욱 역), “하고 싶지 않습니다”(김세미 역),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김태환 역) 등이다. 공진호의 번역은 ‘선택’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런데 ‘하지 않음’을 선택했다고 보고, 바틀비의 행위를 저항의 몸짓으로 평가하는 입장 안에도 여러 갈래가 있다. 반복된 노동에 대한 소극적 저항,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 기계의 부속품처럼 취급되는 근대적 인간의 대안으로 보는 관점 등이다. <피로사회>에서는 병리학적 차원에서 바틀비를 이해한다. 바틀비는 세계와 연관성을 잃고 절망에 압도당한 상태라는 것이다. 한병철은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의 존재신학적 해석은 병리학적 측면을 완전히 도외시했다며 비판한다. 아감벤은 바틀비가 창조하지 않음으로써 절대적 잠재력의 상태에 진입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한병철은 이러한 아감벤의 해석은 바틀비가 필사뿐만 아니라 모든 일을 하지 않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바틀비는 근대에 속한 사람으로 자기착취의 결과로서 극도의 피로에 이른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메시아적 희망을 이야기하는 자가 아니라 좌절과 절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피로사회의 병리와 연결된다. 병리학적 진단을 잘 이해하지 못한 독자에게도 이런 해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분석의 틀을 내려놓고 <필경사 바틀비>를 그야말로 한 사람이 살다 죽은 이야기로 읽으면 가장 먼저 드는 느낌은 ‘절망’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하고 몸에 생기가 넘칠 때 바틀비 이야기를 읽어 보자. 그리고 몸이 많이 아플 때, 더 이상은 무언가를 하고자 해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밀려들 때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읽어 보자. 공감의 넓이와 깊이가 확연히 다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좌절과 절망의 순간 바틀비는 한층 이웃처럼 느껴진다. ※ 껴울리다는 공명(共鳴)하다는 뜻입니다. 한겨레교육 강사, <통합 논술 교과서>·<유형별 논술 교과서> 공저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