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대학의 창립을 뒷받침한 뉴잉글랜드 지방의 상류 계층에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이 많았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본받아 하버드대는 자유 학예의 교양교육, 인문주의적 학풍을 중시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NIE 홈스쿨] 대학의 역사
‘대학’은 서양 문화의 산물입니다. 기원전 387년 무렵,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플라톤이 세운 학교인 ‘아카데미아’에서 대학의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우리가 흔히 ‘대학’이라 일컫는 고등교육기관은 12세기 중세 유럽에서 시작했습니다.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 프랑스의 파리 대학,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등이 대표적입니다.
중세 대학은 교사와 학생의 ‘자치 공동체’였습니다. 오늘날 대학을 뜻하는 ‘유니버시티’(University)는 라틴어인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다수, 복수, 사람의 집합체 등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단체나 국가가 특정 목적으로 세운 기관이 아닌, 교사와 학생이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 스스로 조직한 조합이 바로 중세의 대학이었던 셈입니다.
이들 중세 대학은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자치도시를 배경으로 탄생해 대학 스스로도 법적, 경제적 ‘자치’의 특권을 누렸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은 교회법이나 국법 등에 구속되지 않는 재판권을 가졌습니다. 대학이 원할 때는 언제든지 개강하지 않는 ‘강의정지권’과 대학을 다른 지역으로 옮길 수 있는 ‘이주권’과 같은 특권도 지녔습니다. 실제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은 1209년 옥스퍼드에서 일어난 종교분쟁을 피해 교수와 학생들이 케임브리지로 이주하면서 생겨났습니다.
중세 대학의 또 다른 특징은 ‘토론’의 학풍이었습니다. 교사가 나누어준 교본을 읽고, 해설하는 ‘강의’도 있었지만 교사가 정한 주제에 대해 원문을 읽고, 질문하고, 이의를 제기하며 결론을 끌어내는 ‘토론’ 과목이 중시되었습니다. 학생들 스스로 깊이 고민하고, 자신의 생각을 전개하는 변증법적 지적 훈련이 이미 중세 대학에서 활성화되었던 셈입니다.
이런 자치의 특권과 토론의 학풍은 이후의 유럽 대학들로 이어져 학문의 자유를 중시하는 전통과 ‘담론’을 즐기는 지적 풍토가 뿌리내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중세의 대학을 거쳐 1810년 지금의 독일에는 최초의 근대적 대학으로 불리는 베를린 대학이 세워졌습니다. 중세 대학의 목표가 성직자를 양성하거나 교양인을 길러내는 것이었다면 베를린 대학은 대학 사상 최초로 ‘학문 연구’를 지상 과제로 삼았습니다. 당시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배한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국가는 물리적 힘에서 상실된 것을 정신적 힘으로 보충해야 한다’고 선언하며 교육과 학문 연구 쇄신에 나선 것입니다. 베를린 대학의 창학에 깊이 관여했던 훔볼트는 신분을 차별했던 과거의 봉건적 교육사상을 거부하며 ‘모든 계층과 계급의 재능있는 사람’들을 위한 보편적 인간 교양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은 서양 문화의 산물
중세 대학은 성직자 양성하는
교수·학생 자치공동체였습니다
학문 연구가 본업이 된 건
19세기 들어서부터였고
전문적 연구 표방한 대학원은
미국에서 시작됐습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며 미국에도 대학이 세워졌습니다. 미국 최초의 대학인 하버드 대학의 역사는 1636년 뉴잉글랜드 지방에 세워진 하버드 칼리지에서 시작합니다. ‘뉴잉글랜드’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영국 출신의 이민자가 많았던 이 지역의 상류 계층들은 인문주의적 학풍을 중시했던 케임브리지 대학을 모델로 하버드 칼리지를 세웠습니다. 청교도주의를 따랐던 하버드는 지식과 신앙의 일치를 내세우며 교양있는 성직자 양성을 주요 과제로 삼았습니다. 18세기에는 신학 상의 문제로 보수파와 진보파가 대립했는데 이 과정에서 하버드를 떠난 보수파의 일부가 1701년 뉴헤븐 지방에 예일 대학을 세웠습니다. 영국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듯 미국의 하버드와 예일 대학 역시 일종의 ‘자매교’인 셈입니다. 대학의 역사에서 미국은 ‘대학원의 기원’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일반교양 교육에 집중했던 학부과정에서 더 나아가 전문적인 연구 교육기관으로 미국 대학들은 ‘대학원’을 앞장서 세웠습니다. 1847년 하버드 대학이 신설한 법학전문대학원과 과학전문대학원은 학문과 과학 연구에 일대 혁신을 일으키며 하버드를 비롯한 미국 대학이 세계적 명문 대학으로 발돋움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동양의 경우에는 국가가 세운 최고 교육기관으로서 ‘대학’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국가 통치수단의 일환으로 관리를 양성하고, 사회지도자를 길러내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습니다. 중국의 대학 교육은 기원전 2세기 한나라의 무제가 당시의 수도인 장안에 설립한 국립대학 ‘태학’에서 시작합니다. 유교를 국교로 정한 무제는 태학에 오경박사를 두어 유교 경전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8세기 무렵인 헤이안 시대에 중앙정부의 관리양성기관으로 ‘다이가쿠료’를 운영하고, 지방에는 ‘국학’을 두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고대부터 국가가 운영하는 최고 교육기관이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소수림왕이 372년 세운 ‘태학’이 우리 역사 최초의 국립교육기관으로, 귀족의 자제들에게 유교 경전과 무예 등을 가르쳤습니다. 그로부터 310여년 뒤인 682년에는 신라의 신문왕이 ‘태학’을 설립해 유교 교육을 전담하게 했습니다. 고려 성종 11년(992년)에 세워진 ‘국자감’은 훗날 조선의 ‘성균관’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성균’이라는 말도 고려 충렬왕 24년(1298)에 ‘국학’(국자감)을 ‘성균감’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처음 쓰인 것입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새 왕조의 관제는 모두 고려의 것을 그대로 따른다고 공포했는데, 성균관 직제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이후 태조 3년(1394)에는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성균관 역시 지금의 성균관대학교 자리인 종로구 명륜동에 새로 지어져 1398년 완공되었습니다. ‘성균관’이란 학교명과 학교 위치를 그대로 이어받은 성균관대학교가 ‘건학 600년’이라 셈하는 기준 또한 현재의 위치에 조선의 성균관이 들어선 시점인 1398년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최고학부였던 성균관은 유학 교육을 전담하며 성리학적 통치이념을 갖춘 관리들을 길러내는 기능을 맡았습니다. 전체 사림들의 의견을 모으는 ‘공론장’ 구실까지 맡았던 성균관은 고려의 국자감에 비해 정치적·사회적 비중도 무척 컸습니다. 교과서 펼쳐보기 | 일제하 민립대학 설립 운동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는 기초적인 교육의 기회만 제공하자 교육을 통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자는 민립대학 설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상재 등이 중심이 된 조선 교육회의 제안에 전국 각지에서 호응하여 서울에서 조선 민립대학 설립 기성회가 조직되었다(1923). 기성회는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이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운동이 활성화되자 일제는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감시하고 탄압하였다. 그리고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해 한국인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하였다. 여기에 계속된 가뭄과 수해까지 겹치면서 모금 활동이 어려워져 민립대학 설립 운동은 실패하였다. 그리고 인구의 대다수가 글조차 모르는 문맹인 것을 감안해 대학보다는 노동자 강습소, 야학 등이 더 필요하다면서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비판하기도 하였다.(<고등학교 한국사> 비상교육, 251쪽) 책으로 확장하기 | 산업 논리에 따르는 한국의 대학개혁
오늘날 한국 대학의 화두는 대학의 경쟁력 강화에 있을 성싶다 그리고 이 경쟁력 강화와 관련해 대학의 구조적 개혁 및 세계화가 현실적 과제로 검토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각국의 대학이 공통으로 직면한 역사적 과제로 이해된다. 우리의 경우, 문제는 대학을 둘러싼 개혁 논의가 대체로 경제적 마인드에 의해 구상되고 추진되며 그 궁극적 목적 또한 국가와 대기업의 경제적 경쟁력을 높이는 데 집약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 권력의 주도 아래 강행된 근대화가 산업화를 의미했듯이 고등교육의 근대화 또한 산업화에 초점을 맞춘 기능적·도구적인 성격이 두드러졌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지난날 성균관과 과거제도가 상징한 빛나는 숭문주의(崇文主義)의 교육 전통을, 옛 사대부 계층이 지녔던 담론과 교양의 선비문화를 저버렸다.(<대학의 역사> 살림출판, 83~84쪽)
논제로 정리하기 | 산업 논리에 휘둘리는 대학의 현실
경희대학교 2011학년도 수시1차 모집(인문계Ⅰ)의 논술고사에서는 대학의 기업화를 비판하며 대학이 교육과 연구를 통해 공익에 기여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제시했습니다. 이 제시문을 근거로 ‘사회적 기업은 이윤추구와 사회적 서비스라는 모순적인 두 기능 탓에 제대로 운영되기 어렵다’는 글을 비판하라는 논제가 출제되었습니다. 학생과 교사의 자치 공간이자 학문 연구의 장으로 출발했던 대학이 오늘날에는 산업의 논리, 기업의 논리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습니다.
김영우 기자 torani@hani.co.kr
중세 대학은 성직자 양성하는
교수·학생 자치공동체였습니다
학문 연구가 본업이 된 건
19세기 들어서부터였고
전문적 연구 표방한 대학원은
미국에서 시작됐습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며 미국에도 대학이 세워졌습니다. 미국 최초의 대학인 하버드 대학의 역사는 1636년 뉴잉글랜드 지방에 세워진 하버드 칼리지에서 시작합니다. ‘뉴잉글랜드’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영국 출신의 이민자가 많았던 이 지역의 상류 계층들은 인문주의적 학풍을 중시했던 케임브리지 대학을 모델로 하버드 칼리지를 세웠습니다. 청교도주의를 따랐던 하버드는 지식과 신앙의 일치를 내세우며 교양있는 성직자 양성을 주요 과제로 삼았습니다. 18세기에는 신학 상의 문제로 보수파와 진보파가 대립했는데 이 과정에서 하버드를 떠난 보수파의 일부가 1701년 뉴헤븐 지방에 예일 대학을 세웠습니다. 영국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듯 미국의 하버드와 예일 대학 역시 일종의 ‘자매교’인 셈입니다. 대학의 역사에서 미국은 ‘대학원의 기원’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일반교양 교육에 집중했던 학부과정에서 더 나아가 전문적인 연구 교육기관으로 미국 대학들은 ‘대학원’을 앞장서 세웠습니다. 1847년 하버드 대학이 신설한 법학전문대학원과 과학전문대학원은 학문과 과학 연구에 일대 혁신을 일으키며 하버드를 비롯한 미국 대학이 세계적 명문 대학으로 발돋움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동양의 경우에는 국가가 세운 최고 교육기관으로서 ‘대학’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국가 통치수단의 일환으로 관리를 양성하고, 사회지도자를 길러내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습니다. 중국의 대학 교육은 기원전 2세기 한나라의 무제가 당시의 수도인 장안에 설립한 국립대학 ‘태학’에서 시작합니다. 유교를 국교로 정한 무제는 태학에 오경박사를 두어 유교 경전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8세기 무렵인 헤이안 시대에 중앙정부의 관리양성기관으로 ‘다이가쿠료’를 운영하고, 지방에는 ‘국학’을 두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고대부터 국가가 운영하는 최고 교육기관이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소수림왕이 372년 세운 ‘태학’이 우리 역사 최초의 국립교육기관으로, 귀족의 자제들에게 유교 경전과 무예 등을 가르쳤습니다. 그로부터 310여년 뒤인 682년에는 신라의 신문왕이 ‘태학’을 설립해 유교 교육을 전담하게 했습니다. 고려 성종 11년(992년)에 세워진 ‘국자감’은 훗날 조선의 ‘성균관’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성균’이라는 말도 고려 충렬왕 24년(1298)에 ‘국학’(국자감)을 ‘성균감’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처음 쓰인 것입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새 왕조의 관제는 모두 고려의 것을 그대로 따른다고 공포했는데, 성균관 직제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이후 태조 3년(1394)에는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성균관 역시 지금의 성균관대학교 자리인 종로구 명륜동에 새로 지어져 1398년 완공되었습니다. ‘성균관’이란 학교명과 학교 위치를 그대로 이어받은 성균관대학교가 ‘건학 600년’이라 셈하는 기준 또한 현재의 위치에 조선의 성균관이 들어선 시점인 1398년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최고학부였던 성균관은 유학 교육을 전담하며 성리학적 통치이념을 갖춘 관리들을 길러내는 기능을 맡았습니다. 전체 사림들의 의견을 모으는 ‘공론장’ 구실까지 맡았던 성균관은 고려의 국자감에 비해 정치적·사회적 비중도 무척 컸습니다. 교과서 펼쳐보기 | 일제하 민립대학 설립 운동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는 기초적인 교육의 기회만 제공하자 교육을 통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자는 민립대학 설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상재 등이 중심이 된 조선 교육회의 제안에 전국 각지에서 호응하여 서울에서 조선 민립대학 설립 기성회가 조직되었다(1923). 기성회는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이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운동이 활성화되자 일제는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감시하고 탄압하였다. 그리고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해 한국인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하였다. 여기에 계속된 가뭄과 수해까지 겹치면서 모금 활동이 어려워져 민립대학 설립 운동은 실패하였다. 그리고 인구의 대다수가 글조차 모르는 문맹인 것을 감안해 대학보다는 노동자 강습소, 야학 등이 더 필요하다면서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비판하기도 하였다.(<고등학교 한국사> 비상교육, 251쪽) 책으로 확장하기 | 산업 논리에 따르는 한국의 대학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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