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성적표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학생들. 한겨레 자료 사진
“지난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출제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소송으로 시간을 끈 성태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과 서남수 교육부 장관, 담당자들은 무사히 임기를 마쳤어요. 그 덕에 1만8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스무살 인생 전부를 건 수능을 망쳤어요. 항소심 법원까지 오류를 인정했는데, 평가원이 대법원 상고로 또다시 시간을 끄는 게 과연 옳은가요?”
이번 소송에 원고로 참여한 대학 1학년 딸을 둔 학부모 ㄱ아무개씨는 17일 <한겨레>에 답답한 심정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전날 항소심 법원의 ‘지난해 수능 세계지리 8번 문항 오류’ 판결 이후,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이 상고를 고려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를 접한 뒤다. ㄱ씨 딸은 3점짜리 세계지리 8번 문항에서 감점을 당하는 바람에 사회탐구 백분위가 94%로 떨어졌다. 희망하던 대학은 예비 합격자 2번까지 올라갔다 불합격했다. 최상위권 학생이었지만, 수능 출제 오류 파문 이후 ‘세계지리 8번이 아니어도 어차피 지잡대(지방대) 갈 성적밖에 안 되지 않았느냐’는 기사 댓글에 큰 상처를 받기도 했다.
ㄱ아무개씨는 “수능 이후 오류를 바로잡을 시간이 있었는데도 ‘자리 보전’을 하려고 이 혼란을 초래한 공무원들이 해도해도 너무하고, 사상 초유의 일이라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선례를 남기려고 항소심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전례가 없는 일이라 교육당국에 뭘 요구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지만, 제발 더는 시간을 끌지 말고 피해 구제에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16일 항소심 법원이 1심을 뒤집고 ‘오류’를 인정한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사회탐구영역 세계지리 8번 문항.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유럽연합(EU) 지역을 표시한 뒤 지문 4개(㉠~㉣) 중 옳은 것만 모아놓은 보기를 고르는 문제다. 평가원은 보기 ②번(㉠, ㉢)이 정답이라고 채점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2012년 기준으로 나프타의 총생산액이 유럽연합을 추월했기 때문에 ㉢지문은 틀린 설명이라고 판단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제공
평가원은 17일에도 “판결문을 검토한 이후 상고 여부를 결정하겠다. 이번 주 안으로는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상고를 염두에 둔 행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교육계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교육당국이 조속히 구제 및 보상 대책을 내놔야 한다는 요구가 쏟아지고 있다.
교육단체들은 평가원과 교육부가 ‘법적인 판단’을 할 때가 아니라 ‘교육적인 판단’을 할 시점이라고 지적한다. 하병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변인은 “오류 문항 탓에 등급이 떨어진 학생들을 정원외로 추가 합격시키는 방안 등 피해 구제 계획을 세울 때”라고 말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도 성명을 내어 “교육부와 평가원은 세계지리 출제 오류 판결과 관련한 후속 대책을 마련해 수험생들의 피해나 학교현장의 혼란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정치권은 여·야 할 것 없이, 언론은 보수·진보 할 것 없이, 그리고 전국 지리 교사들 대부분이 작년 수능 세계지리는 오류라고 공감대가 이루어졌다”며 “교육부와 평가원은 상고를 포기하고 피해 학생들이 신속히 조금이라도 피해를 회복할 수 있도록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라”고 촉구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