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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21세기 초등 운동회에 ‘70년대식 교가’ 넘친다

등록 2016-10-04 05:31수정 2016-10-07 22:37

서울 초등학교 402곳 교가 살펴보니…

한강·관악산·북한산 등으로 시작
대한 일꾼, 나라 기둥, 겨레 횃불…
국가주의·민족주의적 사명 강조
현재의 행복보다 미래의 꿈 중시
획일적 가사에 어려운 노랫말 고수
전문가 “교가 다시보기 작업 필요”
서울의 한 초등학교는 2년 전부터 교가의 가사를 바꾸는 작업을 시도 중이다. 1950년대 개교 때 만들어진 교가의 가사가 요즘 어린이들이 따라 부르기에 다소 딱딱하고 의미 전달도 어렵기 때문이다. 교사이자 시인이었던 전임 교장이 “요즘 어린이들이 부르기 쉬운 노랫말을 붙이자”고 나섰지만 쉽지 않았다. 졸업생들의 모임인 이 학교 총동문회에서 “수십년 전통이 담긴 교가를 바꾸면 안 된다”고 결사반대했기 때문이다. 지금 교장이 부임한 뒤에도 총동문회와 면담을 했지만 반대 뜻을 굽히지 않아 교가 개정 작업은 난항을 겪고 있다.

10월 들어 가을운동회가 한창이다. 교가는 운동회를 비롯해 월요조회, 입학식, 졸업식, 현장체험학습, 수련회 등 학교 행사 때마다 전교생이 다 함께 부르는, 초등학생이 자주 접하는 노래다. 하지만 정작 교가를 들어보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요즘 어린이들의 감성과 거리가 먼 내용이 많다. <한겨레>가 서울의 601곳(올 9월1일 기준) 초등학교 중 누리집에 교가 악보나 음원을 공개한 402곳의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교가 가사를 분석해봤다.

■ 명산의 기운을 받자? 402곳 중 303곳(75%)의 초등학교 교가는 도입부를 지리적 명칭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관악산 우뚝 솟은 기상을 안고”(서울 관악구 난곡초), “오천년 역사 안고 흐르는 한강물처럼”(서울 동작구 보라매초), “아차산 등녁에 새날이 오면 정기 어린 가슴에 희망이 솟네”(서울 중랑구 면목초) 등 인근의 유명한 산과 강, 들판, 역사적 유적지 등을 언급하며 이 ‘기운’과 ‘정기’를 본받자는 내용이다.

서울의 초등학교 402곳의 가사에 가장 자주 등장한 서울의 지리적 명칭 1위는 ‘한강’이었다. 한강의 고어인 ‘한가람’을 포함해 ‘한강’은 서울의 초등학교 교가에 총 104회 등장했다. 2위 ‘관악산’(34회), 3위 ‘북한산’(28회) 등 산 이름으로 교가의 도입부를 시작한 학교가 총 206곳에 이르렀다. 근래 개교한 학교의 교가에는 ‘올림픽터’, ‘공항길’, ‘하늘공원’, ‘여의도광장’처럼 현대적 랜드마크도 등장한다.

■ 어린이는 나라의 노동력? ‘대한의 일꾼’, ‘나라의 기둥’, ‘겨레의 횃불’ 등과 같은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 성향의 가사도 많다. “내 나라 큰일 하는 힘을 길러서 대대로 잘살게 할 일꾼이 되세”(서울 강남구 논현초), “오늘은 정성 다해 부모 모시고 내일은 마음 바쳐 나라 위한다”(서울 중랑구 중목초)처럼 ‘충과 효’를 강조하거나, “정의의 길을 밝혀 민족의 등불, 성실히 갈고닦아 나라의 기둥”(서울 강북구 유현초)같이 역사적 사명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처럼 교가에 ‘나라’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포함된 학교는 155곳, ‘겨레’가 포함된 학교는 65곳이었다. ‘나라의 기둥’처럼 ‘기둥’이란 단어가 67곳에서, ‘나라의 일꾼’ 등 ‘일꾼’이란 단어가 87곳에서 등장했다.

■ 현재의 즐거움보다 미래의 큰 꿈? “개미들도 힘 모아 큰일 하듯이, 우리들도 어려움 참고 또 참아, 금수강산 꽃피울 꿈을 키우자.” 서울 동대문구 군자초등학교의 교가 가사다. 이처럼 초등학교 교가에는 어린이들에게 현재의 행복보다 미래의 큰 꿈, 유교적 입신양명을 강조하는 구절들이 많았다. “우리들은 꿈이 있어요. 하늘같이 높은 꿈”(서울 성북구 일신초), “여기서 배운 우리 큰 사람 된다”(서울 관악구 봉현초), “앞만 보고 나가는 대한의 소년”(서울 마포구 아현초), “내 고장 푸른 꿈을 이뤄나가세”(서울 서대문구 북가좌초) 같은 구절들이다.

배성호 서울 삼양초등학교 교사는 “초등학교 교가를 보면 지역마다 명산을 언급하며 이를 이어받을 ‘정기’를 강조하고, 현재의 배움보다 미래를 위한 노력을 중시하며, 어린이의 존엄성 그 자체가 아닌 나라의 노동자원임을 강조하는 국가주의 교육관이 반영된 경우가 많다”며 “학생들이 함께 만들고 시대에 맞는 노랫말이 들어가도록 교가 다시보기 작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 초등학교의 교가 분석연구’(2013) 논문의 저자인 승윤희 한국교원대 교수(초등교육)는 “교가는 학교 교육의 일부로 반드시 필요한 음악활동이지만, 어려운 단어가 들어간 가사는 초등학생이 이해하기 어려워 개선이 필요하다”며 “수십년 동안 학교를 상징하던 교가를 변경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획일적으로 ‘○○산 △△정기’로 시작해 의미도 모르고 부르게 되는 교가의 가사는 좀더 친근하고 이해하기 쉬운 내용으로 일부 개사하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 594곳 초등학교 중 437곳의 교가를 분석한 이 논문을 보면 초등학교 교가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박자는 4분의4 박자로 총 363곳이었고, 조성은 바장조가 173곳으로 가장 많았다. 또한 초등학교 교가를 가장 많이 작사한 작사자는 시인 윤석중이며, 작곡자 김공선이 가장 많이 작곡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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