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랭섬홀 아시아 학생들의 나눔 활동
학생들이 ‘공부 슬럼프’에 빠질 때가 있다. 끊임없이 몰아붙이다 지치거나 배운 내용이 사는 데 별로 쓸모없단 느낌이 들 때. 목적 없는 공부는 학생들을 회의감에 빠뜨려 학습 흥미를 잃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을 머릿속에 무조건 욱여넣고 마는 게 아니라 배운 내용을 경험을 통해 체화하는 학생들이 있다.
제주 서귀포시에 위치한 브랭섬홀 아시아. 이 학교에 다니는 신승은양(12학년)도 한때 슬럼프를 겪었다. 진로 관련해 공부해야 할 내용은 많은데 실제 생활에 쓰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하고 싶은 걸 표출하지 못하는 것도 이유였다. 비슷한 생각을 하던 친구들과 공학동아리 ‘패러다임’을 꾸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변화가 찾아왔다.
처음엔 발명, 적정 기술 쪽 주제를 삼다 사회적 이슈로 관심을 넓히면서 배운 내용을 적용해 문제를 해결해보기로 했다. 지난해 뉴스에서 경주 지진 소식을 접하며 관련 자료를 찾던 학생들은 네팔에서도 지진이 났다는 걸 알게 됐다. 그 과정에서 네팔 농촌 지역 여성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범죄에 노출된 채 생활한다는 걸 접했다. 학생들은 네팔에서 활동하는 국제 엔지오 ‘생명누리’를 찾아 현지 사정을 자세히 파악했다.
신양은 “많은 여성들이 집에 화장실이 없어 밤에 마을 화장실을 가다 성폭행 등 범죄 피해를 당했다. 우리는 목걸이 형태의 치안 손전등을 만들어 이들이 안전하게 화장실에 갈 수 있게 도움을 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디자인 도면을 만들고 3D프린터로 프로토타입을 제작했다. 이 아이디어로 한국경제발전협동조합이 주최한 ‘청소년 공학 아이디어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이후 단체 후원으로 동양미래대학 학생들에게 기술 도움을 받아 실제 제품으로 구현했다. “석달 넘게 협업하며 아이디어도 발전해 나갔다. 불빛을 내는 기능뿐 아니라 송수신이 가능한 버튼을 달아 어려움에 처한 여성들이 신호를 보낼 수 있게 했다. 부족한 제작 비용은 네이버 해피빈을 통해 크라우드펀딩 해 1000만원을 모았다.”
이렇게 만든 제품 80개를 여름방학 때 네팔을 찾아 직접 전달했다. 신양은 “우리가 만든 물건을 받은 여성들이 고맙다며 눈물을 흘렸다. 단순히 만들어주고 끝나는 게 아니라 사용자들의 불편한 점, 한계점을 듣고 보완해 다시 방문할 생각”이라고 했다.
범죄 노출된 네팔 여성들 위해
호신용 손전등 제작해 직접 전달
‘위안부’ 내용 알리는 그림책 펴내며
외국인 교사, 후배들에게 나눠주기도
엔지오와 협업, 영어 버전 책 제작
국제학교 특성 살리며 학생주도 활동
학생들은 활동을 시작하며 공학 분야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드물어 함께할 부원을 찾는 게 가장 어려웠다.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여성들은 발명가가 되지 못해’, ‘물리를 배우는 게 이상하다’는 편견을 깨고 싶었다. 인문사회 분야와 연결할 지점을 찾아 의미있는 활동을 해보자는 생각에 서로 믿고 똘똘 뭉쳤다.
신양은 “엔지오 등 외부 기관을 통해 많은 기회를 얻었지만 그들과 소통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내부에서도 서로 의견이 달랐지만 개인적 욕심을 버리고 네팔의 고통받는 이들을 우선으로 생각하자며 길을 찾아갔다”고 했다.
“동아리 이름인 ‘패러다임’은 이 시대의 사고방식을 뜻한다. 여성 공학자에 대한 편견도 우리가 깨야 할 사고방식 가운데 하나다. 이를 통해 잘못된 부분은 고치고 다음 시대 사고방식을 앞서 만들어가고 싶다.”
이들처럼 ‘재능을 발휘해’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아 나가는 학생들도 있다. 지난 16일 브랭섬홀 아시아 교내에서 만난 백수빈양(11학년)의 손에 책 한권이 들려 있었다. ‘나를 잊지 말아요’란 꽃말의 파란 물망초 그림이 표지를 뒤덮고 있다. 역사동아리 ‘포겟미낫’ 부원들이 펴낸 그림책 <고마워, 나를 도와줘서>다. 일본군 강제 ‘위안부’ 내용을 바로 알고 기리자는 뜻에서, 외국어 소통이 가능한 국제학교 학생들답게 한국어, 영어 버전을 함께 실었다.
백양은 “처음에는 외국인 교사나 한국에 살지 않았던 사람을 대상으로 캠페인을 벌였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인식을 높이려 설문조사를 하고 전교생 앞에서 발표도 했지만 교내 활동은 한계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재작년 개봉한 영화 <귀향>을 함께 보고 사람들이 내용을 쉽게 이해하며 감동할 수 있는 책을 만들기로 했다. 8명의 학생이 글, 그림 팀으로 나눠 책을 만들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책은 어린 꽃 한 송이가 까마귀에게 끌려가 고통을 당하며 돌무더기 속에 갇혀 있다 곤충의 도움으로 귀향한다는 내용이다. 학교 예산을 지원받아 200부를 찍어 일부는 ‘나눔의집’에 전달했다. 현재 이들과 공식 판매도 논의 중이다. 학생들은 교내 외국인 교사나 주니어스쿨 후배들에게도 책을 보냈다. 이 사건을 잘 모르다가 동화책을 읽고 관심 갖게 됐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고맙고 뿌듯했다.
백양은 “<어린 왕자> 같은 책을 만들고 싶었다. 어렸을 때는 왜 이럴까 정도의 동화로만 느끼다 커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된 후 다시 읽었을 때 이전과 다르게 와닿는 것”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우리끼리 공부하는 기회로 삼고 그들에게 별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책을 만들고 난 뒤 할머니들도 좋아했고 주변에서 제대로 된 사실을 알게 됐다는 말을 들으니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 거 같아서 의미있고 힘이 됐다. 앞으로 일본군 강제 ‘위안부’를 비롯해 다른 역사 문제도 우리만의 방식으로 해결해보고 싶다.”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기자 lotus57@hanedui.com
■ 브랭섬홀 아시아는?
2012년 설립한 브랭섬홀 아시아는 캐나다 명문 여자 사립학교인 브랭섬홀의 유일한 외국 자매학교다. 유치부와 5학년까지의 주니어스쿨은 남녀 공학, 6학년부터 12학년까지 미들·시니어스쿨은 여학교로 운영 중이다. 캐나다 본교와 동일한 커리큘럼으로 짜였으며, 국어, 국사 등 과목을 의무적으로 이수해 검정고시 없이 국내 대학에도 바로 지원할 수 있다.
국제공통 대학입학자격제도인 ‘IB’(International Baccalaureat) 커리큘럼을 도입해 아이비리그를 비롯한 세계 명문대 합격생을 다수 배출해냈다. 미국 아이비리그와 영국 옥스퍼드대 등을 포함한 전세계 3천여 대학이 세계 표준 고교 교육과정인 ‘IBDP’를 우선 입학 평가 항목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가별 대학입학자격시험을 따로 볼 필요 없이 IB 점수로만 갈 수 있는 대학이 상당수 있다.
학생 선발은 수시모집으로 이뤄지며, 해당 학년의 정원이 다 찼을 경우 대기해야 한다. 학교는 매주 월·수·금 사전신청을 받아 소규모 캠퍼스 투어를 진행하며, 1년에 2번 수업 참관까지 가능한 오픈데이를 진행한다. 브랭섬홀 아시아는 11월4일(토) 오후 1시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입학설명회를 연다. 문의는 전화(02-6001-3840)로 하면 된다.
16일 제주 서귀포시에 위치한 브랭섬홀 아시아 신승은(왼쪽), 백수빈(오른쪽) 학생이 인터뷰 도중 교내 도서관에서 포즈를 취했다. 최화진 기자
호신용 손전등 제작해 직접 전달
‘위안부’ 내용 알리는 그림책 펴내며
외국인 교사, 후배들에게 나눠주기도
엔지오와 협업, 영어 버전 책 제작
국제학교 특성 살리며 학생주도 활동
‘패러다임’ 동아리 학생들은 단체의 후원으로 동양미래대학 학생들에게 기술적 도움을 받아 치안 손전등을 만들었다. 브랭섬홀 아시아 제공
학생들이 네팔사람들에게 손전등을 전달하며 사용법을 알려주고 있다. 브랭섬홀 아시아 제공
‘포겟미낫’ 동아리 학생들은 위안부 관련 내용을 알리는 한국어·영어 버전 그림책을 만들어 ‘나눔의집’에 전달했다. 브랭섬홀 아시아 제공
그림책 <고마워, 나를 도와줘서>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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