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창덕여중 학생들이 학기말 '청소년 정치참여 프로젝트' 활동 과정에서 모둠별 회의를 하고 있다. 이은상 교사 제공
‘학교 주변의 흡연시설로 인해 학생들이 간접흡연 피해를 겪고 있다. 흡연시설을 설치한 기업은 관련 법규를 위반하지 않았다며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다. 도심 지역 많은 학교들이 이런 문제를 겪고 있다. 이와 관련해 당신은 간접흡연 예방 정책 마련을 위한 프로젝트를 실시하고자 한다. 시민의 정치참여 방법을 활용한 프로젝트 활동 계획을 제시하시오.’
이은상 교사(서울 창덕여중)가 얼마 전 기말고사 때 제시한 사회교과 문제다. 이 교사는 올해부터 정기고사를 선다형 대신 서술·논술형으로 출제했다. 그동안 학생이 했던 활동의 총괄평가를 선다형만으로 하기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 교사는 “사회수업의 목표는 사회현상에 대한 기본 이해를 통해 그 문제 해결에 실제 참여하는 성숙한 시민이 되게 하는 것”이라며 “단순히 내용을 외워 맞히는 것보다 유기적 활동을 통해 실제 삶에 적용하면서 개념을 익히게 하려고 평가방식을 바꿨다”고 했다. 서술·논술형은 어떤 주제를 줬을 때 그것을 학생이 내면화해서 설명할 수 있는지와 관련돼 있다는 뜻에서다.
교사나 학생에게 평가는 늘 부담이다. 교사가 수업 혁신, 모둠별 프로젝트 활동을 시도해도 평가는 늘 걸림돌이 된다. 공정성, 객관성은 늘 평가에 따라붙는 꼬리표다. 정해진 시수에 맞춰 진도표를 짜고 학기 초 평가 계획을 급히 제출하느라 구색만 갖추기 일쑤다. 일부에서는 이 교사처럼 기존의 학습 결과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학습 자체를 위한 평가를 하려는 시도도 있다.
평가는 교사·학생 모두에게 부담
정답 있는 문제 몇개 맞혔나
결과에 방점 찍는 평가 버리고
수업 연동, 구체적인 서술형 출제
활동 과정 등 연계해 피드백하자
공정성·객관성 시비도 사라져
서울 창덕여중 이은상 교사가 진행하는 수업에서 한 학생이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대한 적용활동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이은상 교사 제공
선다형 대신 서술형, 내용 깊이 이해해
이 교사는 1학기 때 3학년 수업을 맡아 수행평가 70%, 서술·논술형 평가는 30%로 하고, 2학기 때는 1학년 수업에서 수행평가 80%, 서술·논술형 평가를 20% 진행했다. 이를 위해 수업 설계를 이해 활동, 적용 활동, 프로젝트 활동 위주로 짰다.
이해 활동은 말 그대로 기본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고, 적용 활동은 교과 내용 관련 주제를 선정해 자료를 수집·분석한 뒤 학생들의 언어로 표현하는 수행평가로 이뤄진다. 이 교사는 “적용 활동으로 훈련된 학생들은 학기말 프로젝트 활동을 한다. 동료와 함께 공동 주제를 정하고 계획서와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 과정에서 교사는 학생들과 대화하며 지속적으로 피드백을 제공한다”고 했다.
가령 사회화 단원에서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여성 혐오’ 현상을 분석하고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보는 미션 활동을 했다. 이후 시험에 ‘여러분이 사회부 기자라고 가정하고, 혐오 현상이 발생한 원인과 해결책을 사회화와 관련해 작성하라’는 문제를 냈다.
기존의 선다형 평가는 교과서에 나온 대로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지식, 가치, 태도를 내면화하는 것’이라는 사회화의 개념을 선택해야 정답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서술형은 유사한 내용을 써도 정답이 될 수 있다. 틀에 박힌 정답보다 학생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표현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평가도 모든 학생에게 서술형으로 피드백을 주는 방식으로 해줬다.
이 교사의 ‘도전’에 학생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시험 끝난 후에 물으니 처음에 겁을 먹었던 게 사실이었다고 했다.(웃음) 이전에는 시험 기간에 문제집 풀거나 학원 갔는데 이건 평소 얼마나 노력했느냐가 중요해서 막연히 불안했다고 하더라. 하지만 막상 문제를 풀어보니 의외로 쉬웠다고 했다.”
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해보니 “아직은 객관식 시험이 익숙하다. 부담이 되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서술·논술형 문제가 사고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답변도 80%였다. 이 교사는 “이 평가 방식을 대비하기 위해 학원보다 학교 수업이 훨씬 도움이 된다는 답변이 압도적이었다. 평가 방식을 바꾸는 게 교사의 수업 방식도 변하게 하지만 사교육을 줄이는 방안이 될 수 있을 거 같다”고 했다. 그는 “현재 시행 중인 성취평가제 목적을 등급을 나누기보다 학생이 성취기준에 도달할 수 있느냐에 둬야 한다. 점수를 매겨도 구체적으로 피드백을 주기 때문에 공정성을 따지는 일은 드물다. 수업마다 평가가 있는데 학생들도 서로 활동 과정을 알고 있어서 점수를 번복할 수 없다”고 했다.
이은상 교사가 서술형으로 출제한 사회 교과 정기고사 문제. 이은상 교사 제공
‘수업-평가-기록’ 하나로, 학습코칭은 덤
인천시교육청은 과정중심, 역량중심 평가를 할 수 있는 ‘수평기(수업·평가·기록) 하나로 시스템’(이하 수평기 시스템)을 개발했다. 올해 2학기부터 희망학교 신청을 받아 41개 중·고교가 사용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교육과정과 수업, 평가, 기록을 연계한 것으로 교과, 자유학기 활동, 창의적 체험 활동을 성취기준과 역량을 기준으로 평가하도록 구성했다. 나이스에서 학년과 번호를 검색해 학생을 등록한 뒤 학급이나 동아리 단위로 설정해 차수별, 학기별 평가를 할 수 있다.
시스템 개발에 참여한 부일여중 구교정 교사는 “수업 중간중간 필요하면 스마트폰을 통해 입력할 수 있어 따로 드는 품이 줄어든다. 학생들에게 그 내용으로 학습 코칭도 해줄 수 있고 학생도 스스로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기존 평가가 지식을 묻는 점수 위주였다면, 수평기 시스템은 교과 내용에 따른 성취기준과 핵심역량 두 가지로 구성했다. 핵심역량은 ‘창의적 융합사고 역량’, ‘의사결정 역량’, ‘의사표현 역량’ 등이다. 주로 수업 태도나 모둠 활동, 발표 능력으로 평가한다.
지난 18일 인천 부일여중 구교정 교사가 수평기 하나로 시스템 화면을 보며 학생들에게 평가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최화진 기자
실제 2학년3반 과학 교과의 평가 내용을 살펴봤다. ‘심장의 구조와 기능을 설명할 수 있고 심장박동이 혈액순환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순물질의 끓는점을 측정하고 끓는점이 물질의 특성임을 설명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사용되는 혼합물 분리에 관심을 갖고 생활 주변 물질의 혼합물 분리 과정을 조사하는 태도를 가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해 다른 사람과 원만하게 소통할 수 있다’ 등 내용이 구체적이었다.
교사가 교과 단원 주제별 평가 내용을 미리 입력해놓고, 등급에 따라 별점을 주면 내용이 자동으로 입력된다. 학생에 따라 내용 수정도 가능하다. 수평기 시스템은 차수별 평가가 학기별 평가에 자동으로 합쳐져 학생이 결과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교사는 ‘학생 성장 기록’에 담긴 내용을 참고해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하고 학부모 상담 때 활용하기도 한다.
구 교사는 “학생을 볼 때 시험 등급이나 수행평가 점수만 보고 ‘수학 잘하는 애’, ‘과학 못하는 애’로 판단했다. 학부모 상담을 해도 ‘우리 아이 성적이 어때요?’부터 묻고 점수로만 옥신각신했다”며 “이 시스템을 쓰니 ‘과학에서 특히 어떤 부분이 약하다’, ‘창의력은 높은데 의사소통 능력이 부족하니 이 능력을 키우도록 노력해 달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했다.
시스템 개발 당시 그는 “어차피 대학 갈 때 점수로 가지 않느냐. 의미 없다”는 반대 의견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교육부도 역량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짜려 하고 요즘 대학도 이전보다 학생 역량을 많이 보는 추세다. 그가 두 딸을 대학 보내면서 직접 느낀 부분이기도 했다. “지식만 묻는 평가, 점수만 보고서는 자신의 학습 능력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자기가 부족한 부분을 발견해내고 교사와 함께 능력을 끌어올리는 게 중요하다.”
인천시교육청은 수평기 시스템을 올해 시범 운영했으며 내년부터 학생이 자기평가와 동료평가에 직접 참여토록 할 계획이다.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기자
lotus57@hanedui.com
점수보다 학습 내용, 학생 성장에 집중
해외 평가제도
제주 서광초 이지선 교사는 교육청에서 마련한 프로그램을 통해 1년 동안 한국국제학교(KIS)에서 파견 근무를 했다. 미국 학교 교육 시스템과 평가 방식을 그대로 가져와 운영하는 곳이라 현지 프로그램과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이 교사는 “국제학교는 중간·기말시험이 없고 프로젝트나 수행과제로 성적을 매긴다. 내용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사지선다와 서술형을 섞어 시험을 보지만 우리처럼 일제평가 방식은 아니다. 교사가 필요하면 수시로 평가하는 식”이라고 했다.
학교는 커리큘럼 코디네이터를 고용해 학년별로 2주에 한번 커리큘럼 개선과 평가를 위한 미팅을 한다. 교사는 온라인 성적표 프로그램을 활용해 분기별로 학생이 수행한 과제나 숙제, 시험 성적 등 학생에 관한 모든 평가 관련 사항을 입력한다. 학부모와 학생은 이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학생의 수준을 알려주는 동시에 평가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셈이다.
그는 “교내 시스템에 학생의 수준을 상중하로 표시하지만 학생이 알 수는 없다. 성적표에는 과목별로 구체적인 평가 내용을 서술하기 때문에 학생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파악하는 성격이 크다”고 했다.
핀란드도 ‘윌마’라는 전자가정통신문 프로그램을 통해 평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교사와 학부모 소통의 창구로 활용한다.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초등학교 4~5학년까지는 점수로 표기하는 평가방법을 사용할 수 없다. 학생의 학습 태도와 성취도 상황을 기록했다가 종합적으로 정리해 학부모에게 통지한다. 8학년부터는 점수 표기가 의무이며 4점부터 10점까지 줄 수 있다. 지자체, 학교, 교사 단위로 자율성이 커서 교사도 수업 설계나 평가에 대한 자율성을 보장받는다.
영국의 한 초등학교 성적표는 학습 성과를 ‘깊이 있는 배움’, ‘배움’, ‘배워가고 있음’ 세 단계로 표시한다. 학습한 내용을 ‘올해의 성장’ 난에 서술형으로 적고 ‘나아가서’ 난에는 앞으로 공부할 내용이나 노력이 필요한 부분 등을 적는다.
우리나라 유치원에 해당하는 프랑스 유아학교 성적표는 평가 내용이 흥미롭다. 학습 영역과 교사의 관찰을 적는 난에 ‘언어나 쓰기를 익히다’ 외에 ‘학생이 되다’, ‘행동하고 신체로 자신을 표현한다’, ‘세계를 발견한다’, ‘지각한다, 느낀다, 창조한다’ 등 다양한 항목도 있다. 영역별로 구체적으로 활동한 내용과 그에 대한 평가 역량을 제시한 뒤 ‘성취’, ‘습득 중’, ‘불확실’로 평가한다.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기자
※서울특별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누리집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