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책마을해리의 미디어학교에 참여한 학생들이 이대건 촌장과 팟캐스트 ‘책 읽는 고양이’를 녹화하고 있다. 최화진 기자
전북 고창군 해리면 라성리. 마을 한가운데 폐교된 지 15년 된 학교가 있다. 입구에 들어서니 교문 대신 나무 책장과 ‘책마을해리’(이하 해리)라는 작은 간판이 보인다. 바로 옆 나무에는 <톰 소여의 모험>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아지트를 본떠 만든 ‘트리하우스’가 자리잡고 있다.
해리는 지역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체험을 책으로 엮어내는 공간이다. 출판사 기획·편집자 출신의 이대건 촌장(‘책마을’이라 ‘촌장’이라 불림)은 서울 홍익대 앞에서 작은 출판사를 하다 10년 전 귀농해 본격적인 ‘책농사’를 짓고 있다. 그는 일제강점 시절 증조부가 유치해 만든 학교를 폐교 후 다시 인수했다. 선조가 애써 만든 교육공간의 의미를 그대로 이어가고 싶었던 것. 문화공간이 부족하고 ‘인문 불평등’을 겪는 지역의 어린이·청소년에게 자기 꿈을 글로 표현하는 기회도 만들어주고 싶었다.
전북 고창 해리면 폐교 땅에
책마을 ‘해리’ 꾸린 이대건씨
‘누구나 책 만드는’ 프로그램 운영
읽기·쓰기·출판 통해 나 들여다보고
타인·세상과 소통하는 시간으로
청소년부터 주민까지 여러 세대 참여
이 촌장은 “청소년뿐 아니라 누구나 한 권의 책을 지어내는 저자 체험을 통해 앞으로 ‘나의 삶’을 지어가는 주체로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다. 덩그러니 비어 있던 공간에 마을 책방을 만들고 주민들도 책을 엮는 작업에 참여하면서 지역민과 외부인을 하나로 잇는 연결점 구실도 한다”고 했다.
‘누구나 책, 누구나 도서관’이라는 모토를 내건 해리는 활자 꾸미기와 글·그림 만들기, 편집하기, 전통방식으로 제본하기 등 기획부터 제작까지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과정을 운영한다. 출판 편집자, 사서, 목수 등 8명의 강사가 프로그램을 직접 꾸린다. <내가 작아졌다>, <넌 너, 난 나>, <열두살 고민 해결서> 등 청소년들의 고민, 생각부터 <책에 빠진 고창 고인돌>, <한권의 책 ‘습지’>, <고창갯벌에 ‘푹’ 빠졌어요> 등 고창의 역사, 문화, 생태와 농업활동, 지역생활사 등 책을 채우는 내용은 다양하다. 이 가운데 정식 출간한 책도 있고 결과보고서처럼 엮어낸 것도 있다.
프로그램은 주제에 따라 당일 체험 프로그램부터 2박3일 캠프까지 다양하게 진행한다. 이 가운데 출판캠프는 기본적으로 ‘읽고, 하고, 쓰고, 펴내는’ 활동으로 이뤄진다. ‘읽기’는 앞선 사람들의 삶의 자취를 배우고 느끼는 일이다. 소리 죽여 읽기, 소리 내 함께 읽기 등 모든 감각과 생각으로 책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기’는 책에서 가상으로 체험한 것을 실제로 체험해보는 것이다. 나무를 다듬고 흙을 매만지고, 먹을거리를 길러내고, 동물들과 만나는 일 등 책에서 펼쳐졌던 일을 직접 해본다.
책마을해리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이 직접 펴낸 책들. 최화진 기자
‘쓰기’는 앞서 읽은 책이나 책 주변에 대한 내용, ‘하기’를 통해 만들어진 것들을 기록하는 일이다. 글쓰기뿐 아니라 그림 그리기, 사진 찍기, 설계도 만들기 등도 쓰기에 포함한다. 이 촌장은 유난히 글 쓰는 일을 어려워하는 아이에게 “말과 글은 한 몸”이라고 이야기하며 마음에 담아뒀던 말을 글로 끄집어내 편지를 써보라고 한다. 모든 글은 암묵적 대상을 두고 쓰기 때문이다. 이후 기본적인 글쓰기와 글을 다듬는 과정도 알려준다.
마지막 ‘펴내기’는 출판이다. 개인의 기록을 우리 사회가 함께 보존하는 ‘공적 기록’으로서 지위를 갖게 하는 일이다. 나 혼자만 보는 게 아니라 책을 통해 내가 다른 사람과 만나는 길이 바로 펴내기 과정이다. 해리는 책을 펴내기 위해 자체 출판 브랜드 ‘도서출판 기역’, ‘나무늘보’, ‘책마을해리’를 운영 중이다.
글쓰기, 출판학교뿐 아니라 사진 촬영, 드론, 팟캐스트 제작 등을 할 수 있는 미디어학교, 목공작업과 연계한 인문건축학교도 책을 바탕으로 한다. 가령, 인문건축학교는 목공 기술을 배우기 전에 나무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부터 한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등의 책을 읽으며 나무가 인류와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각해본다. 나무가 단순히 만들기 재료가 아니라 우리와 온기와 정감을 나누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느끼는 과정이다. 이 촌장은 “해리 입구 옆 트리하우스도 이런 나무와의 관계를 고민해 나온 아이디어다. 아이들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만 읽어도 주변의 원목 테이블과 나무가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이런 활동 과정을 모두 기록해 책에 담아낸다.
프로그램 운영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계약서를 쓰는 일이다. 최선을 다해야 제대로 된 저작행위의 결과물과 그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이전까지 건성건성 하고 놀 궁리만 하던 아이들이 멋진 책을 직접 만들겠다는 목표가 생기는 순간 눈빛이 달라진다. 활동에 책임감을 갖고 이전보다 열심히 보고 듣고 찍는다.
이 촌장은 “책을 통해 앞선 사람의 기록을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처럼 한 권의 책을 펴내는 것은 한 개인의 생각을 이전 세대, 다음 세대 사람들과 만나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 모두 작가가 되라는 게 아니다. 자신의 생각과 성취한 내용을 다른 이들과 보통의 언어로 소통하는 열쇠 하나를 쥐여주는 일이다.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아이들의 몫”이라고 했다.
딸 이우현(17)양은 “해리 프로그램에 참여해 마음속에 두서없이 구겨져 있던 생각을 그림이나 시로 옮겨 담으면서 정리가 됐다. 내 안에 쌓인 앙금이 풀어지거나 붙잡혀 있던 고민이 풀릴 때도 많았다”며 “이곳에서는 참가자가 모든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며 무조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이양이 지금까지 정식 출판한 책만 50권에 달하며, 활동 내용을 묶어 소책자로 만든 것도 수십권이다. 처음부터 출판을 염두에 두고 참여했다기보다 자연스레 관심사나 하는 일을 기록하며 생긴 결과물이다.
책을 펴내기 전 마지막 과정은 저자 소개를 쓰는 일이다. 이 촌장은 ‘미래의 나’, 보통 30~40년 뒤의 모습을 상상해 가상의 이력을 써보라고 한다. 아이들은 ‘우주정거장 도서관 관장을 했다’, ‘백만장자가 돼서 기부활동을 펼쳐 광화문광장에 자신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등 짧지만 재밌는 방식으로 자기 전기를 미리 쓰며 저마다의 꿈을 꾼다.
해리에는 지역 청소년뿐 아니라 서울과 경기도 등 수도권에서도 알음알음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다. 현재 프로그램은 10~15명 정도 그룹으로만 진행한다. 출판캠프는 방학 때만 시즌제로 운영하고 나머지는 상시로 참여가 가능하다. 그림책학교, 시인학교, 만화학교, 한지와활자체험 등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 외에 마을 어른과 성인, 가족 대상 프로그램도 있다.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기자
lotus57@hanedu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