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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태권도로 해결되지 않는 것

등록 2018-01-01 20:12수정 2018-01-01 20:22

[0교시 페미니즘]
모임에서 교사란 걸 들키면 으레 아이들 관련 고민을 듣게 된다. 그날도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1학년 남자아이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교사와의 첫 상담에서 아이가 점심 놀이 시간 내내 책만 보고 주변 남자아이들하고도 전혀 못 어울린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게다가 갑자기 학교 가기 싫다고 해서 상황을 들어보니 새 짝꿍이 아주 기가 센 여자애라 이만저만 시달리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야기는 요즘의 기센 여자애들에 대한 성토로 이어졌고, 그 남자아이를 ‘태권도 학원'에 보내라는 다른 보호자의 조언으로 끝났다.

성평등 교육을 한다고 말을 꺼내면 요즘 여자아이들이 얼마나 기가 센지, 또 그 때문에 내 아들이 학교에서 얼마나 당하는지 이야기를 들을 때가 많다. 요즘 같은 역차별 시대엔 오히려 남자애들 기 살리는 교육을 하는 게 바로 성평등 교육이라는 답도 돌아온다.

사실 초등학교는 여자아이들에게 어느 정도 유리한 공간이다. 아직까지 책상 앞에 조용히 앉아서 교사의 말을 경청하고 눈치 빠르게 답하는 식의 수업이 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리가 달랑하게 들리는 어른용 의자에 앉아서도 ‘어쨌든 다리를 모으고 얌전히 앉을 것'을 요구받는 게 여자아이들 아닌가. 자기 몸 크기에 맞춰진 의자에 앉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반대로 남자아이들은 짧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리에 앉아서 40분을 가만히 있으라’고 요구받는다.

저학년 시기엔 양쪽 다 감정 조절이 어렵고 표현도 서툴다 보니 몸으로 부대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특히 여자아이에게 맞은 남자아이들이 교사에게 속상함을 하소연하러 오는 일은 거의 없다. 나는 폭력의 피해자인데, 위로받는 것이 아니라 학원에 다녀서라도 바꿔야 할, 문제 있는 아이 취급을 받는다.

여자아이가 누군가에게 맞았다고 했을 때 ‘태권도 학원에 다녀서라도 강해져라'고 충고를 할 사람이 있을까? 여자아이가 점심시간에 얌전히 앉아 책을 읽는 게 과연 남자아이가 그랬을 때만큼 문제가 될까? 얌전히 다리를 모으고 앉아 있는 것 덕분에 늘 칭찬받은 여자아이가 운동장에서 뛰어놀지 않게 되는 건 너무 당연한 일 아닐까? 나를 가장 사랑하는 어른들에게 폭력에 의한 피해를 말한 순간 위로 대신 모자라는 아이 취급을 받았던 남자아이가, 자신의 두려움을 표현하기는커녕 그것을 인정조차 못하게 되는 건 어떤가?

상상해보자. 점심시간 남녀가 어울려 신나게 공을 차는 운동장의 모습을. 남녀가 어울려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책을 읽고 겨울을 맞아 함께 뜨개질하는 모습을. 장기자랑 시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는 여자아이와 속상할 때 눈물 흘리고 적절한 위로와 사과를 받는 남자아이 모습을. 아이들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성별과 상관없이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학교. 그것이 바로 성평등한 학교의 모습이다.

서한솔(서울상천초등학교, 초등성평등연구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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