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 일본어 ‘오타쿠’의 한국식 발음 ‘오덕후’의 줄임말입니다. 집 안에만 틀어박혀 취미생활을 하는 사회성 부족한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지칭하며 나온 말이죠. 영어식 표현인 ‘Geek’(긱) 또한 오타쿠와 같이 뭔가에 열중하는 ‘이상한 괴짜’ 등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다가 차츰 어떤 특정 분야에 상당한 흥미와 열정을 갖고 몰입하는 이를 뜻하는 긍정적인 표현이 됐죠. 지금은 이렇게 뭔가 하나에 몰입해 자기 분야를 찾는 이들을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 핵심 인재상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덕후의 핵심은 ‘몰입’에 있습니다. 이들은 관심 분야에 대해 진정성 있게 몰입하죠. 해당 분야를 전공하거나 직업으로 두지 않았음에도 그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이뤄냅니다. 드론, 블록체인, 인공지능 등 급변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세계적인 혁신 기업들은 이런 몰입형 인재를 찾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학입시를 비롯해 교육계 전반에서 특정 분야에 대한 확고한 진로 로드맵을 갖고 진정성 있게 몰입하고 활동한 학생을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저도 덕후에 가까운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제가 몰입했던 분야는 ‘학술연구’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학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학술연구, 콘퍼런스 등에 관심을 보이며 뭔가를 연구하는 행위 자체를 좋아했습니다.
학술연구를 보다 더 많은 사람과 함께 해보고 싶어 다양한 활동도 했습니다. 고교 2학년이던 2013년 교내 학술동아리 ‘스프레드’(SPREAD)를 설립했습니다. 이는 곧 100여개 학교가 모인 연합동아리가 됐습니다. 2014년에는 청소년 300여명이 참여한 첫번째 청소년 주최 학술 콘퍼런스도 열었습니다. 꾸준히 학술대회를 개최해오며 지금은, 매년 세계 11개국에서 3000명 넘는 청소년이 참가하는 아시아 최대 청소년 콘퍼런스로 거듭났습니다.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제가 설립한 ‘한국청소년학술대회 KSCY’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연구를 발표하고 교류할 수 있는 청소년 학술 교류의 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교육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교육용 툴킷을 개발·배포하고 있으며 청소년 연구자료들을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학술지와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또 저소득층 학생들 가운데 이런 학술연구를 하려는 청소년을 위한 장학금도 만들었습니다. 저는 단체를 운영하며 수많은 학자의 연구를 돕고 그들이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돕는 ‘학술 정보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이는 문헌정보학이라는 학문을 선택하여 전공하는 계기가 됐고요.
사실 처음부터 공부에 흥미가 있거나 진로가 뚜렷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과학이 좋아 막연히 과학고로 진학할 줄 알았던 중학생 시절, 진로에 대한 고민과 함께 갑자기 인문사회 분야에 관심이 생기면서 방황을 거듭하다 일반고등학교로 진학했습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한 것 같았던 방황의 시기는 제가 진정 몰입할 수 있는 분야들을 하나둘 찾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아하는 것에 심취하고 몰입하는 게 덕후라면 누구든 덕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학생 때 학교 공부 외에 뭔가에 몰입하는 건 쉽지 않죠. 아무리 뛰어난 덕후여도 기본적인 학업 수행 능력이 요구됩니다. 대학을 선택할 친구들이라면 이를 충족하지 못할 경우 현실적으로 입시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렵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 덕후로서 제 관심 분야에 대한 몰입 그리고 학업과 균형을 이뤘던 경험들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제 사례뿐 아니라 인문사회과학계열, 이공계열, 융복합계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만의 몰입을 경험한 친구들 이야기도 나눠보겠습니다. 많은 청소년 독자가 한국의 교육환경 안에서 스스로 자기 분야를 개척하고, 몰입하는 경험을 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재가 되길 희망합니다.
이세영(연세대학교 문헌정보학 전공, 한국청소년학술대회 KSCY 조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