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절 교육 시간.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강사님이 다도 예절을 가르쳐주러 오셨다.
“여학생은 빨간색 방석에, 남학생은 파란색 방석에 앉으세요.”
강사님 말씀에 따라 26명의 학생들은 양쪽으로 흩어져 질서정연하게 각각 빨간색, 파란색 방석에 앉았다.
“바르게 앉는 것이 예절 수업의 시작이에요. 남학생들은 주먹을 무릎에 올리고 의젓하게, 여학생들은 손을 가운데에 가지런히 모아 공손하게 앉아볼까요?”
손의 모양과 위치가 달라지니 남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어깨와 가슴이 쫙 펴진 자세가 되었고, 여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소극적이며 조심스러워 보였다.
남학생과 여학생에게 다른 모습을 요구하는 이런 풍경이 낯설지는 않다. 학습 준비물로 공책이라도 사 줄 때면 남학생에게는 로봇이 그려진 파란 공책을, 여학생에게는 인형이 그려진 분홍 공책을 나누어준다. 남학생에게는 “사나이가 그런 것 가지고 우는 거 아니야”라고 달래고, 글씨를 못 쓰는 여학생에게는 “여자애 글씨가 이게 뭐야. 더 예쁘게 써야지”라고 말한다. 이런 말들이 차곡차곡 쌓여 여자다운, 남자다운 아이들이 완성된다.
아이들이 느끼는 여자답게, 남자답게는 어떤 모습일까? <답게? 답게!> 수업을 기획하여 4학년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먼저 ‘여자답게’라고 적힌 분홍색 스티커를 가슴에 붙이고 달려보라고 하니 무릎과 팔을 한껏 접어 옆으로 흔들며 제자리에서 달렸다. 반면 파란색의 ‘남자답게’ 스티커를 붙이고 달려보라는 말에는 교실 바닥이 흔들릴 정도로 쿵쿵대며 교실 안을 이러저리 전속력으로 달렸다. ‘여자답게 웃어보세요’라는 지시에는 손을 입으로 가리며 “호호” 웃었고, ‘남자답게 웃어보세요’라는 말에는 배를 손으로 잡고 허리를 꺾는 등 몸집을 크게 하며 박장대소 하는 시늉을 했다. 머리카락을 넘기고, 공을 던지는 것도 성별에 따라 다르게 행동했다.
여자답게, 남자답게 행동하는 모습에 왜 차이가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아이들은 “여자는 이래야 하고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요”라고 대답했다. 11살의 ‘답게’라는 박스(편견)는 견고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미디어를 통해 단단하게도 쌓아올린 것이다. 이 고정관념을 버리고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까 물으니 바로 “나답게 행동해요!”라는 대답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여자답게, 남자답게 스티커를 떼어내고, 내가 원하는 색의 스티커를 찾아갔다. 스티커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아이들이 스스로 ‘나답게’, ‘재현이답게’, ‘민주답게’를 써서 자신의 가슴에 붙였다.
“나답게 달려보세요.” 그제서야 26명이 26개의 색을 가진 ’나다운 모습’이 나타났다. 운동은 싫다며 설렁설렁 뛰기도 하고, 환하게 웃으며 신나게 달리기도 했다.
이 수업 뒤 우리 반에서는 글씨를 잘 쓰는 민찬이에게 “무슨 남자애가 글씨를 이렇게 잘 써?”라고 말하지 않았고, 힘이 센 하율이에게 “쟤는 여자가 아냐, 완전 남자야”라고 말하지 않았다. 여자답고 남자다운 모습 대신, 나다운 모습이 무엇인지 찾아갔다.
젠더 교육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성별에 가려져있던 아이들의 ‘진짜 색’을 찾아주는 것. 아이들이 여자·남자 구별 없이 자신답게 행동하고 사고할 수 있도록 돕는 것. 부모세대가 가진 고루한 성별 편견을 없애고 아이를 바라보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
초등젠더교육연구회 ‘아웃박스’ 김수진 교사
예절 수업 시간. “남학생들은 주먹을 무릎에 올리고 의젓하게, 여학생들은 손을 가운데에 가지런히 모아 공손하게 앉아볼까요?”라는 강사의 말은 여학생과 남학생의 ’자세와 태도’를 일순간 다르게 만들었다. 남학생들은 어깨와 가슴이 쫙 펴진 ’당당한 자세’가 되었고, 여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소극적이며 조심스러워 보였다. 초등젠더교육연구회 ’아웃박스’ 김수진 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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