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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초등학교 졸업 65년 만에 ‘불수능’ 보고 왔습니다”

등록 2018-12-24 20:15수정 2018-12-24 20:23

[함께하는 교육] 6080 만학도의 꿈

‘배움에 나이가 문제 되나요’
중·고교 과정 4년 동안 배운 뒤
팔순 앞두고 수능 치른 만학도
‘학종, 자소서’ 입시용어 어색하지만
학구열만은 십대 못지않아
“모교 생겼다는 게 제일 기쁩니다”
지난 20일 서울 마포구 일성여자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오전 4교시 수업을 마친 뒤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일성여중고는 늦깎이 학생들을 위한 2년제 학력인정 평생학교다. 졸업반 학생 가운데 158명이 올해 ‘불수능’을 치렀다. 유영자씨(맨 앞줄 왼쪽 셋째)는 이 학교 최고령 학생으로, 얼마 전 한 대학의 사회복지학부 면접을 보고 왔다. 김지윤 기자
지난 20일 서울 마포구 일성여자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오전 4교시 수업을 마친 뒤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일성여중고는 늦깎이 학생들을 위한 2년제 학력인정 평생학교다. 졸업반 학생 가운데 158명이 올해 ‘불수능’을 치렀다. 유영자씨(맨 앞줄 왼쪽 셋째)는 이 학교 최고령 학생으로, 얼마 전 한 대학의 사회복지학부 면접을 보고 왔다. 김지윤 기자
대학 입시를 앞둔 고3 수험생이라면 귀가 닳도록 듣는 ‘학종’(학생부종합전형)과 ‘자소서’(자기소개서). 이 두가지 말에 해당하지 않아도 올해 ‘불수능’을 치른 6080 어르신들이 있다.

어린 시절 ‘여자가 공부해서 뭐 하느냐’ ‘오빠랑 남동생 공부시키느라 공장 다녀야 했기 때문에’ 등 여러 이유로 학업을 이어가지 못한 만학도를 위해 개설된 일성여자중고등학교(이하 일성여중고) 고3 졸업반 이야기다.

일성여중고는 개인 사정으로 제때 학업을 마치지 못한 만학도가 중·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는 2년제 학력인정 평생학교다. 구한말 지식인 이준(李儁) 열사의 고향인 함경남도 북청 출신 실향민들이 1952년 설립한 일성고등공민학교가 그 뿌리다. 교육을 통한 나라 살리기 운동에 힘쓴 이 열사의 뜻을 기리고자 학교 이름도 그의 호 ‘일성’(一醒)에서 따왔다.

이 학교는 2000년 서울시 교육감으로부터 2년 6학기제 학력인정을 받았다. 중학교 과정은 의무교육이라 등록금을 내지 않지만, 고교 과정은 소정의 등록금을 내야 한다. 여느 학교처럼 방과후수업을 통해 부족한 과목에 대한 보충수업을 받을 수 있고 ‘특활’(특별활동)은 구청 등의 지원으로 무료 진행한다.

지난 20일 낮 12시,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일성여중고를 찾아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만은 한국 최고라고 자부하는 6080 만학도들을 직접 만나봤다.

65년 만에 ‘대학 입학’ 꿈꾸다

“19살 학생들과 면접장에 나란히 앉아 있는데 눈물이 나더군요.”

이 학교 최고령 학생인 유영자(78)씨의 말이다. 팔순을 앞둔 유씨는 지난 11월15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금란고등학교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65년 만이다. 최근에는 한 대학의 사회복지학부 면접까지 다녀왔다.

유씨는 5남 1녀 중 막내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초등학교 졸업 뒤 학교 문턱을 그리워만 하며 살았다. ‘공부를 왜 하고 싶냐’는 큰오빠의 닦달에, 속 깊은 생각을 꺼낼 수 없던 시절이었다. 유씨는 “배움의 날개를 달고 자유로워지고 싶은 꿈이 늘 있었다”며 “2015년 이 학교에 들어온 뒤 공부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면서 우울증에서도 벗어났다”고 했다.

25살에 상경해 결혼한 뒤 50년 가까이 ‘배움의 한’을 품고 살았던 유씨. 그는 공부를 너무 하고 싶어 일흔이 넘은 나이에 5㎞ 마라톤에도 도전했다. ‘공부의 기본은 체력’이라는 생각에서다. 공부하고 싶어 달리기를 시작했더니, 평생 안고 살던 저혈압도 싹 나았다. 일성여중고에 입학한 뒤 수능시험까지 치를 줄은 몰랐는데, 막상 고3 졸업반에 올라오니 ‘고사장에라도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유씨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역사와 과학이다. 영어와 수학은 아무래도 어렵다며 멋쩍게 웃었다. 유씨는 “역사와 과학을 배우니 또 다른 세상이 열리더라. 뉴스에 나오는 새로운 기술 이야기도 이해하게 되고 ‘우주’에 대한 여러 개념을 접하니 참 재미있었다”고 했다. “자식들 모두 대학 보낸 것도 뿌듯하지만, 내가 직접 수능 응시자가 되어보니 감회가 남다르더군요. 무엇보다 졸업한 뒤 찾아갈 수 있는 모교가 생겼다는 점이 가장 좋습니다.”

4년 동안 왕복 3시간…‘학구파’ 재학생도

경기도 안양시에 사는 안옥임(65)씨는 ‘학구파’ 재학생으로 유명하다. 영어 암송부터 사자성어, 간체자, 학술상까지 휩쓴 안씨는 재학 중 한문 지도사 자격증도 땄다. 중학교 과정부터 고3 졸업반인 지금까지 4년 동안 안양과 서울을 매일 오갔다. 왕복 3시간 지하철 등굣길, 짜투리 시간을 활용해 틈틈이 한자를 외우고 영어문장을 암기했다. 특히 한자는 “싱크대 주변에 붙여놓고 설거지하면서 하나 외우고, 저녁 준비하면서 두개 외웠다”고 했다. 그만큼 배움의 갈증이 컸던 것이다.

지난 20일 일성여중고 교실에서 안옥임(65)씨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인 세계사와 한문 교과서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4년 동안 왕복 3시간 거리의 학교로 통학하며 ‘공부왕 상’ ‘학술상’ 등을 받은 우등생이다. 녹내장을 극복한 안씨는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할 예정이다. 김지윤 기자
지난 20일 일성여중고 교실에서 안옥임(65)씨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인 세계사와 한문 교과서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4년 동안 왕복 3시간 거리의 학교로 통학하며 ‘공부왕 상’ ‘학술상’ 등을 받은 우등생이다. 녹내장을 극복한 안씨는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할 예정이다. 김지윤 기자

안씨는 한 백화점에서 10년 넘게 일한 뒤 정년퇴임을 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컴퓨터 활용 능력이 필요한 때가 오자, 그길로 학원에 등록해 공부하는 등 일하면서도 배움의 끈을 늘 붙잡고 있었다. 퇴임 뒤 만학도를 위한 학교를 알아보다 이곳에 입학한 게 벌써 4년 전이다.

처음에는 가족들에게 비밀로 했다. 공부가 너무 좋았지만 ‘늦게 배운다’는 사실을 어쩐지 숨기고도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손주가 장난감을 찾겠다며 안씨의 가방을 뒤적이다가 ‘줄줄이 사탕처럼’ 역사, 한문, 수학 등 교과서를 꺼내면서 딸에게 ‘들켰다’고 했다. 딸은 “엄마가 너무 자랑스럽다. 왜 숨기셨느냐”며 누구보다 큰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고 있다.

안씨 역시 올해 ‘불수능’을 치렀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해 공익을 실천할 수 있는 관련 센터를 여는 게 안씨의 꿈이다. 늦깎이 대학생이 될 생각에 요즘 부쩍 설레지만, 안씨에게도 고비는 있었다. 대학 병원에서 녹내장 진단을 받은 것이다. 의사가 ‘눈을 혹사하면 안 된다’며 공부를 그만두라고 권했지만 안씨는 그럴 수 없었다. 지금도 약을 먹어가며 공부하고 있는데, ‘경제’와 ‘세계사’ 과목을 참 흥미롭게 배웠다고 했다. “매일 안양에서 서울까지, 전철을 갈아타고 마을버스를 옮겨 타며 4년을 보냈지요. 1교시 종 치는 소리, 4교시 수업 종료를 알리는 멜로디 모두 소중한 추억이 됐습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가르쳐주신 선생님들이 참 고맙고 감사하지요.”

“때를 놓쳤어도 교육받을 수 있어야죠”

이선재 교장은 57년 동안 만학도를 위한 교육을 해왔다. 졸업시킨 학생만 6만명 가까이 된다. 초등 6년을 비롯해 중·고등 6년, 공교육 과정에서 제때 배운 사람들도 ‘다시 배워야’ 살 수 있는 시대, 이 교장은 그럴수록 ‘때를 놓친 사람들의 교육받을 권리’야말로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선재 일성여중고 교장은 지난 57년 동안 만학도를 위한 교육을 해왔다. 졸업시킨 학생만 6만명 가까이 된다. 김지윤 기자
이선재 일성여중고 교장은 지난 57년 동안 만학도를 위한 교육을 해왔다. 졸업시킨 학생만 6만명 가까이 된다. 김지윤 기자

이 교장은 “지금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에도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학생이 바로 만학도”라며 “공부하기 싫어서 못 한 분들이 아니다. 친구가 학교 가는 거 숨어서 보며 울고, 월급 받아 자신이 아닌 오빠나 남동생 위해서 썼던 분들”이라고 했다. 이 교장은 한국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분들의 ‘숨은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나이 들어 학교를 찾는 학생들의 간절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19살 청소년과 69살 만학도의 유일한 차이점은, 등굣길 경사진 언덕을 오르는 데 걸리는 시간 정도겠지요. 배움에 있어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말은 언제나 유효합니다.”

김지윤 <함께하는 교육> 기자 kimjy13@hanedu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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