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에서 자신의 책에 서명을 하고 있는 이재연 작가.
“그리고 싶고 또 그려야 할 그림은 많은데 시간이 없어요. 세월이 화살처럼 빠르다는 게 실감 나요.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 꿈속에서도 그림을 생각할 정도예요.”
일흔살이 넘어 그림책 작가로 첫발을 내디딘 이재연(71) 작가는 미국의 국민화가로 불렸던 모지스 할머니와 많이 닮았다.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할머니가 된 뒤에 붓을 들었고, 마음의 고향인 농촌의 풍경을 그림에 담은 점도 그렇다.
그는 영감이 떠오르면 언제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작업실을 준비해 놓고 있다. 서안 2개를 길이 방향으로 침대 옆에 붙여 놓았고, 그 위엔 붓과 물감 등 각종 그림 도구와 화첩을 준비해 두었다. 침대 옆에 걸터앉아 손만 뻗으면 곧바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방 한편에는 작업 중인 화첩 10여권이 있고, 창가와 책장에는 여러 종류의 화분에 담긴 다육이(다육식물)가 도톰한 살을 뽐내고 있다. 이곳은 경기도 파주 큰아들네 아파트의 작은 방 한칸이지만, 그의 첫 그림책 <고향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의 소재인 고향 충남 유성(현재는 대전광역시)의 마을과 들과 산을 담은 세상이다.
그는 따뜻한 색감으로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동작과 표정까지도 세밀하게 묘사를 했으며, 그 시대 딸로서 여자로서의 삶에 대한 어려움과 서러움도 담아 화가·작가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 칠순 나이에 그림에 빠져들어
― 그림책에는 어떤 작품들이 실렸나?
“농촌의 사계절을 보여주는 60여편의 그림이 들어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렸다. 계절이 바뀌면서 논과 들판이 어떻게 변하는지, 모내기부터 추수와 탈곡 등과 물레방앗간, 새끼 꼬기 등 농촌의 일상을 담았다. 내 어린 시절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한 집과 산과 들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모습과 관련된 것이 많다.”
― 일흔을 넘기셨는데.
“살림 형편이 어려웠던 탓에 생활하고 자식 키우느라 어떻게 세월이 갔는지 모른다. 두 아들이 결혼한 뒤에는 손자·손녀 봐주느라 틈이 없었다. 그런데 손주들이 큰 뒤에도 온종일 집에서만 지내는 걸 본 며느리가 2~3년 전에 ‘밖에 나가서 활동 좀 하세요’ 하며 주민센터 도자기 만들기 강좌와 도서관의 ‘북그리미’ 동아리에 등록해준 게 바깥 활동의 계기가 됐다.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이 신기하고 재미있었고,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면서 새 세상을 만났다. 시작이 힘든데 새로운 문이 열렸다. 한번 빠져드니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게 잇따라 생겨났다. 그림이 완성되면 페이스북에도 열심히 올려 남에게 자랑했다.”
― 그림에 재능이 있었군요.
“북그리미 활동을 하면서 학교 졸업 뒤 처음 그림을 그린 것인데, 재능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중학교 때도 미술 선생님이 그림 잘 그린다고 한 적이 있다. 그때 장순일 화가가 멘토였는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림 실력도 많이 좋아진 것 같다.”
― 그때 그린 그림을 모아 책으로 냈는지?
“그 이후 교하도서관에서 자서전 만드는 ‘기억의 재생’이란 프로그램에도 참가했다. 고향 그림에 글을 곁들인 <인동초의 아름다운 날들>이란 작은 자서전을 만들고 전시회도 했다. 거기서 그림을 본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때 그 프로그램을 맡았던 소동출판사 김남기 대표가 책으로 출판하자고 제안을 했다. 첨엔 아직 실력이 안 된다고 사양했으나 김 대표가 계속 권유를 해서 그림책 출판을 하게 됐다.”
― 올해 1월에 책이 나왔죠?
“내가 세상에 태어나 살다 무의미하게 그냥 가는 줄 알았는데 책을 낸다고 하니 내가 세상에 이름 석 자는 남기고 가겠구나 하는 생각에 신이 났다. 밥을 먹는 것도 잊은 채 밤이고 낮이고 그림을 그려댔다. 머리에서 기억을 막 끄집어냈다. 의욕도 샘솟듯이 넘쳐났다.”
― 고향을 그리는 이유는?
“형제가 11남매인데, 내 바로 위에 쌍둥이 언니들이 있다. 그 언니들이 암 투병을 하는 걸 보고 내가 돌아가야 할 고향이 떠올랐다. 그리고 잊지 말고 기억을 해야겠다는 뜻이었다. 내가 논길을 따라 고향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상상해 <고향 가는 길>을 그렸다. 고향을 소재로 한 첫 작품이다. 이후 연작 형식으로 고향을 계속 그렸다. 우리 손주들에게 할머니는 저런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들려주고도 싶었다.”
■ 실버들에겐 그림이 치매 예방
― 실버들에게도 그림 그리기가 도움이 될 것 같다.
“기회가 될 때마다 실버들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하고 있다. 그림에 소질이 없더라도 낙서를 하듯이 생각나는 대로 그리면 된다. 잘 그려야만 그림인 것은 아니다. 하다 보면 나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잘 그려야 한다면 화가에 맡기면 되고 똑같이 그리려면 사진으로 찍으면 된다.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고 생각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면 치매 예방에도 좋다.”
― 그림 연습을 따로 하는지?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어 도서관에 가서 풍속화첩을 보고 따라 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또 길을 가다 꽃이나 나무를 보면 꼼꼼히 살펴보고 스케치를 하기도 한다. 거울을 보고 자화상을 그리기도 한다.”
― 작가로 데뷔하고 난 뒤 변화가 많았을 텐데.
“방송에도 여러번 출연했고, 여기저기서 강연이나 북 토크를 요청해 바삐 다니고 있다. 멀리 제주도에도 한번 다녀왔다.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다. 내 책을 보고 고향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 그 연세에 드물게 페이스북도 하시는군요?
“10여년 전에 손주들 키우면서 싸이월드를 했었다. 그때는 심심풀이로 다육이를 키웠는데 다육이와 손주들 사진을 올리는 재미로 했다. 최근에 그림을 그리면서 페이스북에 업로드를 하고 있다. 팔로어도 많이 생겼다. 문인들이 많고 출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 늦둥이 손주 그림 등 작업 계속
― 첫 책이 2쇄를 했는데, 새로운 책 준비는?
“늦둥이 손주가 16개월인데 매일 성장일기를 써오고 있다. 7, 8권이 된다. 또 틈틈이 다육이 그림도 그리는데 그것도 서너권이 된다. 이것들도 책으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젊었을 때는 내 생활이 거의 없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됐다. 고향과 부모, 형제자매, 지나온 세월…. 고생스러울 때는 시간도 안 갔는데, 지금은 시간이 너무 빠르다. 이 소중한 시간을 아껴 더 많은 그림을 남기고 싶다.”
글·사진 김학준 선임기자
kimhj@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