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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문학은 아이들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등록 2020-02-03 18:30수정 2020-02-04 02:07

30년 문학수업 풍산중 이낭희 교사

문학을 삶에서 실천할 수 있게
생생한 문학 수업법 만들어
감상의 주체는 교사 아닌 학생

내면화하는 생산 단계가 핵심
문학부터 비문학 관통하는 수업
수능·내신 두마리 토끼 모두 잡아

30년차 이낭희 교사는 자신의 생생한 문학 수업법을 담은 <나만의 문학수업을 디자인하다>를 지난해 출간했다. 이낭희 교사 제공
30년차 이낭희 교사는 자신의 생생한 문학 수업법을 담은 <나만의 문학수업을 디자인하다>를 지난해 출간했다. 이낭희 교사 제공

또 국어였다. 2018년 ‘불수능’ 논란의 주역이었던 국어 영역이 2019년 수능에서도 수험생들의 ‘멘탈’을 붕괴시켰다. 현 수능 체제가 도입된 이래 2018년, 2019년의 국어 영역 표준점수는 최고점 1, 2위를 나란히 기록했다. 국어에서 갈렸다는 의미다. 추세가 이러하니 학생들은 국어 1타 강사, 출제 예상 문제에 더욱 목을 매는 형국이다. 여전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수시 전형을 노리는 수험생들은 수업 시간마다 밑줄 치기 바쁘다. 결국 교실 안과 밖 어디에도 문학으로서의 문학이 있을 곳은 없다. 이미 날것 그대로의 문학을 감상하고 즐기는 여유는 사라진 지 오래다.

방법이 없을까. 언제까지 문학 수업이 시험을 위한 도구로 머물러야 할까. 교문을 나서도 학생들의 마음에 문학이 살아 숨 쉬게 할 수는 없을까? 30년 동안 고등학교와 중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쳐온 이낭희 교사의 조금 특별한 수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이제 여러분의 눈앞에 남도의 5월이 펼쳐집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청보리밭 한가운데서 여러분의 마음은 어떨까요? 더 들어가 봅시다. 1930년대, 어두운 시대 현실에서 푸르른 생명의 청보리밭을 만난 시인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그 시인은 뭘 봤을까요?”

이낭희 교사는 학생들이 아무런 준비 없이 김영랑 시인의 ‘5월’을 만나게 하지 않는다. 이미지를 펼치고 사물에 말을 걸며 발상의 지점에 초대한다. 학생들이 작품 속으로 뛰어들 채비를 마치면 서서히 ‘5월’로 안내한다.

“시를 낭송하면서 행마다, 연마다 자신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시어에 세모 네모 동그라미 표시를 해보세요.” 이른바 이미지 찾기. 화자가 뿌려놓은 시의 바다에서 시어를 망에 낚는 활동이 이어진다. 이 교사는 정형화된 해설 대신 맥락을 관통하는 여러 단계의 질문을 던지며 학생들이 섬세하게 시를 감상하고 이해하도록 돕는다. 이 과정에서 시화와 시를 연결하는 퍼즐게임, 한 문장 내용 요약, 관련 영상 감상, 인물망 그리기 등 다양한 기법이 활용된다.

자세한 해설은 학생들이 충분히 감상을 마친 그다음에야 이어진다. 학생들이 낚은 시어들을 정리정돈 해주는 시간이다. 공감각적 심상, 3인칭 관찰자 시점, 액자식 구성과 같은 자세한 문학 용어는 여기서 등장한다. 이미 충분히 작품을 감상하고 분석한 터라 학생들은 어렵지 않게 개념을 이해한다.

수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나의 작품을 온전히 내면화하는 문학 재생산 단계가 남았다. 글, 영상, 프레젠테이션 등 다양한 생산 활동을 통해 학생들이 ‘작품 속 나’와 ‘현재의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이 교사는 이 단계가 수업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문학을 감상으로만 끝내면 책을 덮고 답안지를 내는 순간 사라집니다. 우리 인생에서 문학이 살아 숨 쉬게 하려면 생산을 위한 태도로 다가가야 하죠. 내가 문학 생산자라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이해와 분석의 깊이부터 달라집니다.” 이 교사는 수업 시간에 배운 문학을 학생들이 삶 속에서 표현할 줄 알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문학의 힘이 있는 학생이 의사가 된다면 어떨까요? 세심하게 환자의 증상을 묻고 마음까지 들여다보는 의사가 됩니다. 건축가라면요? 작은 카페 하나를 지어도 따뜻함이 넘치는 공간으로 만들겠죠. 이게 진정한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내면화하는 생산 단계에서 학생들이 만든 작가 이상과의 카카오톡 대화(왼쪽)와 가상으로 제작한 시인 윤동주 페이스북(오른쪽). 이낭희 교사 제공
작품을 내면화하는 생산 단계에서 학생들이 만든 작가 이상과의 카카오톡 대화(왼쪽)와 가상으로 제작한 시인 윤동주 페이스북(오른쪽). 이낭희 교사 제공

시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수필, 고전문학 같은 다른 갈래의 문학 수업 역시 같은 방식으로 진행한다. 학생이 주체가 되는 시간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 등장인물에 공감하도록 돕는거죠. 소설 <만세전>으로 가봅시다. 이인화란 인물이 있습니다. 조국의 현실에 순응도 반항도 못 하는 지식인입니다. 그럼 나는요? 내 안에도 그런 모습이 있지 않나요? 내가 그라면 어떻게 할까요?” 작품에 푹 빠져든 학생들은 그 속에서 다양한 군상을 만나고 공감하며 비판적 성찰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처럼 끊임없이 작품 속 인물을 만나는 연습은 글쓴이의 의도가 뚜렷한 비문학을 읽고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이 교사는 설명했다.

수업은 제대로 통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이면 팔짱을 끼고 문학 수업을 듣던 학생이 4월이 되자 연필을 잡고 작품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직접 만든 문학 홈페이지에는 전국 각지 학생들이 올린 작품들로 넘쳐났다. 이 교사만의 문학 수업법을 담아 펴낸 책 <0교시 문학시간>은 현직 교사는 물론 예비 교사, 학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무려 14쇄나 찍었다.

이 교사의 수업에 대해 누군가는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교사의 수업은 시험을 뛰어넘으며 진정한 빛을 발한다. “수능 국어는 ‘낯선 작품에 대한 도전’이에요. 저와 함께 수없이 많은 낯선 작품에 말을 걸며 감상하는 법을 익힌 학생들은 새로운 지문이 나와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이제 학생들은 ‘모의고사에 제발 모르는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이 교사에게 투정 아닌 투정까지 부린다.

수시를 노리는 학생들에게도 이 교사의 수업법은 호응을 받는다. 수시의 당락을 좌우하는 학교생활기록부 항목은 세특(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이다. “세특의 변별력은 교사가 얼마나 양질의 수행평가를 진행했느냐에서 갈려요.” 이 교사가 마련한 문학 재생산 시간, 학생들은 메타적 글쓰기, 영상시 만들기, 작가의 에스엔에스(SNS) 꾸미기, 자유연상 포토에세이 만들기, 작가 탐구 프로젝트 등 여러 포맷으로 저마다의 이해력과 상상력을 발휘해 훌륭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수업 시간 저절로 경쟁력 있는 세특을 채우는 셈이다.

30년이 흐른 지금도 매 수업마다 자신만의 수업을 ‘디자인’해 학생들을 만난다는 이낭희 교사. “사람이 온다는 건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오는 거라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고 대단한 일입니까. 문학시간에 학생들이 저에게 온다는 것이….”

정고운 기자 nimok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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