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우 덕성여대 이사장이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덕성여대 종로캠퍼스에서 설립자 차미리사 선생 사진 앞에서 개교 100년의 포부를 밝히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일제강점기 3·1 독립운동 정신을 바탕으로 태동한 덕성여대가 지난 19일 창학 100돌을 맞았다. 식민지 시대에 여성의 해방과 자립의 기치를 높이 들었듯이 덕성여대를 포함한 덕성학원은 밀레니엄 시대에도 그 정신을 계속 확대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1920년 근화(무궁화)학교를 시작으로 여성교육에 헌신해온 덕성학원은 이제 ‘민족을 품고 세계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세계로 나가 ‘새로운 100년’을 만들려 한다. 지난해 9월 덕성학원의 선장에 오른 안병우 이사장은 “일제와 여성에 대한 이중의 억압을 이겨내고 지켜온 그 정신으로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려 세계를 향해 달려가겠다”고 강조했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학교를 설립한 과정을 설명해달라.
“100년이 우리 민족사적으로도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전에 세워진 다른 학교와 달리 평범한 교사 출신 여성이 학교를 세웠다는 것이 특이하다. 또 당시 배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주부 등 일반 여성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도 시대를 앞서나간 정신이었다. 부인이 자각해야 사회가 건강해진다는 대중교육을 지향했다. 이런 평범한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해 나라의 독립을 찾으려 분투한 것은 최근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다. 3·1 운동 정신을 바탕으로 태어난 학교라 독립운동에 열정을 가졌던 것이라 생각된다.”
―설립자이신 차미리사 선생은 어떤 분인가?
“차 선생은 미국 유학을 한 뒤 배화여학교 기숙사 사감을 했으며, 3·1 운동 당시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야학을 시작했으며, 이듬해 조선여자교육회를 만들고 그 산하에 부인야학강습소를 열었다. 강습소 연 날을 개교기념일로 하고 있다. 여성의 자립·자생·자각이 목표였다. 선생은 학교 설립 자금도 모으는 한편, 여성들을 깨우치기 위해 전국을 돌며 순회강연을 했다. 그 기금을 바탕으로 현재의 덕성여고 자리에 학교를 마련했다. 야학강습소의 이름도 근화학원으로 바꿨다. 실질적인 직업교육을 위해 재봉부를 만들고 주산·타자 교육도 했으며, 1930년대에 인문교육으로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근화여자실업학교로 방향을 완전히 틀었다.”
―차 선생과 관련한 일화가 많을 것 같은데.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일제의 눈 밖에 난 차 선생은 교장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의 정기를 담은 근화라는 이름도 덕성으로 바꿨다. 하지만 그는 학원 이사장직을 유지하면서 독립운동과 여성운동을 계속했다. 그의 업적은 오랫동안 가려져 있었으나 덕성여대 한상권 교수의 재임 시 노력으로 2002년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 그는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40년대에도 변절하지 않았고, 해방 뒤에는 분단 정부 수립 반대 등 통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벌였던 근화학교 학생 21명도 2018년과 2019년 독립유공자 표창을 받았다. 말 그대로 독립운동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4·19 때에는 중학생 2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숨진 일이 있다. 민주화운동의 여정에도 깊숙이 동참했다.”
―코로나19 때문에 100주년 기념식도 영향을 받았을 텐데.
“창학 기념일 이틀 전인 지난 17일 학생 대표 등 일부만 모여 장기근속 직원 포상과 동창회 기념식수를 하는 등 간략한 기념식으로 끝냈다. 공식 기념식은 일단 6월로 미뤘는데, 지금의 상황으로 봐서는 그것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100년 이후’의 비전은 무엇인가?
“역사성 회복 프로젝트로서 100년 전 여성교육의 중심지였던 안국동 덕성여중·고를 중심으로 기숙사 등 옛 건물을 복원하고, 남성 중심의 독립운동을 양성평등으로 바꾼 여성 독립운동가 21명을 재조명하는 등 ‘여성 독립운동가 거리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덕성여대가 자리한 도봉구와 성북·노원·강북구 등에서는 동북 4개 구 독립유산 기초조사와 활성화를 위한 노력도 펼치고 있다.
또 전문학자들이 참여해 덕성학원 100년사를 편찬 중이다. 학교만이 아니라 한국사 전체로서, 학교 자랑이 아니라 객관적 역사로서 기록할 참이다. 얼마 전까지 1920년대 한국의 상황, 교육, 여성사가 새롭게 조명을 받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해 논문으로 발표한 경우도 있다.”
―세계화 시대인데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법인은 학생들이 어렸을 때부터 세계시민 교육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덕성여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매년 해외연수를 보내고 있다. 덕성여중은 2015년 이후 프랑스 귀스타브플로베르학교와 매년 상호 방문을 하고 있다. 우리 학생 15명과 프랑스 한국어반 학생 20여명이 서로 홈스테이 등을 하면서 양국의 친선 외교관 역할을 하고 있고, 고등학교도 1학년 학생들(13명)은 독일, 일본의 학교들과 매년 교류를 하고 있다. 고 2학년(14명)의 경우 통일의식 고양 차원에서 ‘백두산 평화기행’이란 주제로 2018년부터 매년 연수를 진행하고 있다. 학생들은 중국 연변의 과학기술대학교를 비롯해 윤동주 생가 방문, 백두산 천지 견학 등을 통해 민족문제를 체험하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2000년 초반부터 실시했던 하와이와 싱가포르 등의 문화체험 교류를 확대한 것이다.
‘백두산 평화 기행’에 참여한 덕성여고 학생들이 백두산에 올라 천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덕성학원 제공
차 선생의 정신을 21세기에 곱새겨보면 아직도 소외당하고 경제적 자립이 어려운 여성이 많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여성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게 덕성이 해야 할 과제다. 민족의 소중함을 가슴에 품고 세계로 나가 여성 해방을 해야 한다. 교육의 기회가 없는 개발도상국가의 여성들에 대한 연구 교육 지원을 대학의 과제로 삼고 있다. 유엔 위민과 협력해 동남아 국가들과 협력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코이카의 지원으로 캄보디아에 한국 음식의 진출도 추진하고 있다.
또 한국 남자와 결혼한 외국인 여성이 많다. 대부분이 가사도우미 정도의 역할에 그치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자립을 할 기술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열 계획이다.”
―재단의 재정이 튼튼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대사업을 하는 부동산도 있고 기금도 있다. 많은 사립대학이 법에 정해진 재단 전입금을 내지 못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내고도 여유가 있는 편이다. 서양 외국의 유명 대학에 비하면 약소하지만 국내 실정으로 보면 재단의 재정은 상위라고 볼 수 있겠다.”
―최근 재정 문제 등으로 재단이 소란스러웠었는데….
“원만하게 마무리가 됐다. 중립적이라고 평가되는 개방이사가 이사장이 된 것이 의미 있는 일이다. 나는 교수를 하다가 이사가 됐고 이사장까지 됐다. 앞으로 학교의 발전을 위해 온 역량을 모으는 데 힘을 쏟겠다.”
김학준 기자
kimhj@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