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살다 교직생활 20년 하면서 이런 일로 경찰서 가는 건 처음이다. 나는 교사로서 너무 수치스럽다.”
아동·청소년 디지털 성착취 피해자인 ㄱ씨는 상담 교사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경찰 조사를 받기 위해 함께 이동하던 차 안에서 였다. “(경찰 조사에) 누가 가야 하는데 제 보호자는 그럴 상황이 안되니까, 그냥 의무처럼 그렇게 하신 것 같아요. 신경을 쓰셨다기보다 학교에서 정해진 매뉴얼대로 진행하신 것 같아요.”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내놓은 ‘아동·청소년 성착취 피해예방과 인권적 구제 방안 실태조사-디지털 성착취 피해를 중심으로’ 보고서에 담긴 2차 피해 사례다.
인권위가 디지털 성착취 피해 실태를 망라한 보고서를 지난달 31일 공개했다. 2019년 텔레그램 엔(N)번방 사건 등으로 디지털 성착취의 심각성이 알려진 뒤 인권위 차원에서 피해 실태를 살핀 보고서를 처음으로 내놓았다. 보고서에는 심층면접조사에 참가한 아동·청소년 디지털 성착취 피해자(현재 나이 14살∼22살) 15명이 디지털 성착취 구조에 유입되고, 학교·수사기관·법정에서 2차 피해에 노출되고, 성착취 피해자를 향한 왜곡된 사회적 인식에 시달리는 실태가 생생히 담겼다.
피해자들은 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오픈채팅방, 랜던채팅앱 등을 통해 성착취 범죄에 유입됐다. “급하게 용돈이 필요해서 에스엔에스에서 알바를 찾다가 속옷을 파는 글을 보고 저도 글을 똑같이 올렸어요. 그걸 보고 어떤 남성이 연락을 했어요.” “친구를 사귀고 싶어서 ‘친구 만나는 앱’을 검색해 익명 채팅을 깔았어요.” “아는 언니가 (채팅앱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몇시간 동안 설득을 했어요.” 이렇게 미성년자인 피해자와 접촉한 가해자들은 온라인 그루밍을 통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 뒤 성적인 관계나 촬영물을 받아냈고, 이를 유포하겠다며 협박 수단으로 삼아 ‘성착취’ 행위를 지속했다.
디지털 성착취 피해만큼이나 또래집단이나 학교, 수사기관에 의한 2차 피해도 심각했다. 특히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전문성이나 아동·청소년 권리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 관계기관 종사자들의 ‘무심한’ 일처리가 곧장 2차 피해로 이어졌다. 한 피해자는 조사 과정에서 경찰이 가해자에게 전화해 자신의 실명과 신고 사실을 언급했다고 밝혔다. 다른 피해자는 학교에서 교사를 마주칠 때마다 “너 지금은 안 그러지?”라는 말을 지속적으로 들어야 했다. 또다른 피해자는 선생님과 피고인이 모두 있는 법정에서 검사로부터 ‘왜 성인용품을 사달라고 했냐’는 추궁을 당했다.
디지털 성범죄 특성상 재유포와 확산이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은 피해자들에게 ‘트라우마’로 각인됐다. “제가 원래는 안 그랬는데, 그때 이후로 휴대전화를 맨날 무음으로 해놓고 있어요. 진동이 울리면 너무 깜짝깜짝 놀라요. 그 사람일까봐.” “일단 그냥 무섭죠. 제 사진이 노출된 것도 있는데 그건 아직 못 찾았으니까. 너무 심하게 걱정하면 제가 힘들 것 같아서 조금 내려놓고, 그냥 제 현재 일에 집중하고 있어요.”
피해자들은 부모나 상담기관을 통해 피해사실을 수사기관에 알린 뒤에도 적절한 지원과 안내를 받지 못했다. 심층면접 조사에 참여한 피해자 대부분은 수사 결과를 모르고 있었고, 법원에서 재판 내용과 결과를 직접 고지받은 피해자도 없었다. 다만 지원기관의 조력을 받는 피해자의 경우 해당 기관을 통해 재판 경과를 안내받을 수 있었다.
보고서는 디지털 성착취 피해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피해 구제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짚었다. 한 피해자는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받은 위로를 고백했다. “사실 저는 성매매 피해여성이라는 단어를 여기 (지원)센터에 와서 처음 들었단 말이에요. 사회에서는 당연스럽게 가해자랑 같이 범죄를 일으킨 사람으로 바라보잖아요. ‘네가 더러운 선택을 한 거고, 범죄행위를 일으킨 거지. 왜 그렇게 합리화하려고 하냐.’ 그런 이야기를 듣다가 여기 와서 ‘너는 피해자야’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많이 울었어요. 왜냐면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곳이 여기밖에 없었거든요.”
보고서는 “이러한 지지 체계가 형성되려면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착취 범죄를 바라보는 대중의 인식전환이 필수적”이라고 짚었다. 규율의 주안점을 ‘성을 파는 청소년’이 아닌 ‘성을 사는 구매자’로 옮긴 청소년성보호법 개정 이유를 상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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