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차별 제도 폐지해주세요.”
“여성이 장애인도 아니고 왜 가점을 주나요?”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가 영화 공모전에서 여성 창작자가 제작에 참여하면 가점을 주는 ‘성평등 지수’ 제도를 운영하면서 받은 민원 내용이다. 이 제도를 운영한 2021년부터 온라인 게시판 등을 통해 접수되는 것으로, 남성 지원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역차별 제도란 게 주다. 그러나 성평등 지수 제도는 남성 창작자도 가점을 받도록 하고 있다. 제도에 대한 오해 불식과 함께, 엄연한 구조적 성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해 성평등 지수 제도는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영화계에선 나온다.
영진위 지원사업 심사에 성평등 지수 제도가 도입된 건 지난해다. 영화제작의 핵심인 감독·프로듀서·작가·제1주연이 여성인 공모작에 가산점을 최대 5점 주는 제도다. 미투운동과 함께 영화계 성차별이 문제 제기된 뒤 2018년 영진위에서 구성한 한국영화성평등소위원회(소위원회)가 3년여 검토 끝에 도입됐다. 한해 앞서 소위원회는 성평등 영화 정책을 운영하고 있는 해외 사례와 국내 영화계 성평등 실태 등을 분석한 연구 결과(<한국영화 성평등 정책 수립을 위한 연구>)를 내놓았다.
한국 여성 영화인에게 ‘유리천장’과 같은 구조적 성차별은 현실 그 자체다. 소위원회의 연구결과를 보면, 2009~18년 10년 동안 개봉한 영화에서 여성 감독은 전체 1525명 중 176명으로 11.5%에 불과하다. 상업영화를 연출한 여성 감독은 8.5%다. 이외에도 제작자(15.7%), 프로듀서(23.4%), 작가(25.0%), 주연(33.9%) 등 핵심 창작 인력으로 꼽히는 모든 분야에서 여성 비율이 남성보다 현저히 낮다. 영화 교육 입문 단계에서는 남녀 차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같은 기간 전국 대학교 연극영화과 졸업생의 57.6%,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학생 32.3%가 여성이었다. 영진위 관계자는 <한겨레>에 “이러한 현상은 여성 영화인이 의사결정권자의 위치로 올라가는 과정 중 구조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며 “영화계 내 여성의 과소대표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성비 균형 조성을 첫번째 목표로 설정한 이유”라고 말했다.
상업영화 감독 성비. <한국영화 성평등 정책 수립을 위한 연구(2020)> 갈무리
영화 속에서도 여성이 과소대표되긴 마찬가지다. 지난해 9월 한국영화감독조합이 주최하는 양성평등주간 행사인 ‘벡델데이 2021’에서 영화 속 여성이 얼마나 주도적인 캐릭터로 등장하는지 가늠하는 벡델테스트 등의 기준을 적용해 벡델 영화 10편과 일반 흥행작 18편을 분석했다. 그 결과, 2020년 7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흥행한 한국 영화에서 남성 인물이 등장한 시간이 여성보다 2배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벡델 영화의 경우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이 대다수인데도 남녀 등장인물의 시간 점유율이 비슷했다. 여성 중심의 서사에서는 남성의 이야기도 함께 다뤄지지만, 남성 중심 서사에서는 여성 이야기가 크게 배제되고 있다는 얘기다.
영화계에선 여성 인력을 주요하게 써본 경험이 없어 기회 불평등의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성비 불균형이 큰 직종인 촬영감독으로 일하는 여성 ㄱ씨는 <한겨레>에 “경험의 기회가 주어져야 다음 단계를 밟을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 작은 기회조차 잘 주어지지 않는다. 업계에서도 (여성을 주요 인력으로 쓴) 경험이 부족하니 선뜻 일 맡기기를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 상업영화로의 진출이 쉽지 않은 이유”라고 했다. 그는 “기회의 사다리를 마련하는 차원에서 성평등 지수 등 여성 인력을 찾도록 유인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영진위 성평등소위 위원으로 활동했던 조혜영 영화평론가는 “성평등 지수가 필요한 이유는 여성이 약자라서가 아니라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 동안 이어져 오고 있는 구조적 불평등을 해소해야 하기 때문”이라며 “구조적으로 예산 마련이 힘든 지역영화나 독립영화에 영진위가 지원해온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남성 지원자도 본인을 제외한 다른 핵심 창작자에 여성 인력이 참여하도록 하면 가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가령 남성 프로듀서가 가점을 받기 위해 능력 있는 여성 작가나 촬영감독을 발굴하게 되고, 이는 여성 영화인 발굴에 강력한 동기부여가 될 거라는 이야기다. 조 평론가는 “질적 성장을 위해선 새로운 주제와 시각이 계속 필요하다. 남성 위주였던 영화 제작의 핵심 창작자가 여성으로 확장된다면 당연히 작품들도 더 새로워지고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성비 불균형 개선이 영화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사례는 적지 않다. 스웨덴영화협회는 지난 2011년 주요 창작자의 성비 50:50 의무화 정책을 세우고 2년 만에 목표를 달성했다. 이후 신진 여성 감독들이 베를린·칸영화제 등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수상 성과를 내면서 질적 변화까지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럽 여러 국가에서 유사한 제도를 시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국은 영화 제작 지원 조건에 ‘다양성 기준’(다양성을 충족해야만 지원하는 방안)을 두고 있다. 캐나다는 ‘여성 영화인 경력개발을 위한 기금’을, 오스트레일리아는 ‘여성의 이야기를 위한 기금’과 함께 성평등 정책 개발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아일랜드에선 신진 여성작가와 감독을 위한 제작지원 및 성비 50:50을 위한 젠더 플랜을 운영하고 있다.
박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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