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IT)업계 여성 시이오(CEO) 정아람잡아쓰를 상상해 그린 그림. 사진 책 <it업계 성차별="" 핫it슈=""> 갈무리</it업계>
“이번 수업을 통해 생각보다 많은 곳에 성차별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하철 안내 방송은 왜 여성의 목소리이며, 엔트리(초등학생용 코딩 프로그램) 캐릭터의 의사는 왜 전부 남성인지 등 새로운 시각을 갖고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서울 방화초 5학년 류지석군)
28일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 초등학생 18명이 떼 지어 입장했다. 서울 방화초등학교 5학년1반 학생들이다. 이틀 뒤 6학년이 되는 이들은 ‘아이티(IT)업계 성차별’을 주제로 지난해 11월부터 넉달간 고민한 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국회를 찾았다.
이날 국회 방문은 김상희 국회부의장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지난해 12월3일 방화초 5학년1반 이명희 담임교사와 학생들은 <초등학생들이 밝힌다! IT업계 성차별 핫IT슈>라는 제목의 그림책 발간을 위해 크라우드펀딩을 진행했는데, 이 소식을 접한 김상희 부의장이 이들을 국회로 초대한 것이다. 김상희 부의장은 “과학기술정보통신방송위원으로 활동하며 과학기술계 인력 성비 불균형 문제에 주목해 왔다”며 “학생들이 아이티업계 성차별 이슈를 조사하고 공부해 책까지 냈다기에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고 했다. 발표회에 참석한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초등학생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다기에 (대통령 선거) 유세 일정도 안 잡고 왔다”고 했다.
지난해 ‘이루다 사건’이 있었다. 20대 여성의 모습으로 꾸민 인공지능 채팅로봇 캐릭터 ‘이루다’가 성소수자와 특정 인종에 대한 혐오의 표현을 거르지 않았고, 이용자들은 그를 향해 성희롱을 했다. 개발사 스캐터랩은 문제가 되자 지난해 1월 이루다 챗봇 서비스를 잠정 운영 중단했다. 이 사건을 거치며 아이티업계 성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이 형성되고 있지만 초등학생에게 이 문제는 쉽거나 친숙하지 않다. 최서림양은 “한 달에 한 권씩 학급문고의 책을 정해 읽는데, 에이다 러브레이스(1815∼1852, 최초의 프로그래밍언어를 구사했다고 알려진 여성 수학자)를 알게 됐다. 당시 시대적 분위기 탓에 대학 진학조차 할 수 없었으나 끝내 컴퓨터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로부터 시대가 한참 지난 지금은 과연 어떨까 궁금했다”고 했다.
아기·강아지·할아버지 등 다양한 가상 인플루언서들이 참가하는 오디션의 풍경을 상상한 그림. 사진 <it업계 성차별="" 핫it슈=""> 갈무리</it업계>
학생들이 교사의 도움을 받아 확인해 본 통계는 처참했다. 컴퓨터 학과 재학 인원, 전임교수 성비 모두 성별 불균형이 심각했다. 실제로 지난해 9월 여성가족부가 내놓은 조사결과를 보면, 인공지능 사업 추진 기업의 소프트웨어 전문인력 여성 비율은 19.1%이며, 인공지능 사업 추진 기업 대표자 여성 비율은 3.1%에 그쳤다. 학생들은 이런 불균형이 차별로 이어진 사례를 일상 곳곳에서 찾아냈다. 최서림양은 “대부분의 인공지능 비서 목소리는 다 여성이고, 챗봇 캐릭터도 여성이며, 루지 같은 가상 인플루언서도 전부 예쁘고 몸매가 좋은 여성이었다”고 했다. 구글 포토앱이 흑인을 인식하지 못했던 사례, 여권 로봇이 동양인의 눈을 감은 것으로 인식해 자꾸 오류가 있었던 사례도 알게 됐다. 아이들은 그림책에 이렇게 적었다. “아이티 기술 개발자들 대부분이 남자란 말이야. 당연히 데이터를 학습시키는 과정에 편견이 들어가지 않겠어?”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유쾌한 상상력도 덧댔다. 인공지능 목소리를 내 취향대로 바꾸는 앱을 출시한 여자 ‘잡스’의 모습, 아기·강아지·할아버지 등 다양한 가상 인플루언서들이 참가하는 오디션의 풍경 등을 그려 넣었다. ‘초등학생이 아이티 회사에 바라는 점 7가지’도 소개했다. “인공지능에게 데이터를 학습시킬 때 반드시 여자 직원이 함께 하게 해주세요” “새로운 서비스나 기술을 유통할 때 성차별적 요소가 없는지 한번 더 생각해 주세요.”
책을 만들며 현실 세계의 성차별을 경험하기도 했다. 지난 1월 크라우드펀딩 소식이 한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그 밑에 악성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김동현군은 “‘예쁜 에이아이(AI)를 부러워한 못생긴 아줌마의 열폭’이라는 댓글이 너무 어이없어서 기억난다”고 했다. 이명희 교사는 “이게 ‘찐 세상’이다, 성차별 이슈는 워낙 복잡하고 민감하다. 하지만 좋은 취지로 했던 일인만큼 위축될 필요 없다고 아이들을 다독였다”며 “‘이것도 차별 아니에요?’ ‘차별이 이렇게 많았어요?’라고 물어오는 학생들, ‘여성 빅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되겠다’는 학생을 보고 있노라면 수업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28일 오전 10시 국회 의원회관에서 ‘초등학생 눈으로 본 IT분야 성차별 국회 발표회’가 열렸다. 사진 김상희 의원실
발표가 끝나고 발표자로 나섰던 학생 3명에게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셋 모두 성차별은 있고, 우리나라가 바뀌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대답했다.
“성차별은 있어요. 단순히 성비 때문만이 아니라, 아이티 업계에서는 육아휴직도 잘 못 간다고 알고 있거든요.”(최서림양)
“여성을 위한 편의시설이 적다고 알고 있어요. 그래서 꿈을 덜 키우는 것 같아요.”(김동현군)
“바꿔야 할 게 아직 있는 것 같아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그렇고요. 여성에게는 불필요한(덜 중요한) 일을 시키는 것 같아요.”(정민재군)
최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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