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족성폭력 피해자 ㄱ씨는 어릴 때 겪은 성폭력을 고소했지만, 경찰은 증거 부족을 이유로 불송치했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피해자 입장에서는 인생을 짓누른 가장 큰 사건이잖아요. ‘가해자가 부인한다’는 이유로 이토록 쉽고 단순하게 종결되는 게 맞나요?”
20대 여성 ㄱ씨는 지난해 8월 아버지를 경찰에 고소했다. 4살부터 11살까지 아버지에게 당했던 성폭력 피해를 수사기관에 알리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ㄱ씨는 아버지를 가정폭력을 휘두르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술을 마시고 어머니와 다툴 때면 살림살이를 내던지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는 ㄱ씨의 방으로도 들어왔다. ‘이 집에서 마음에 드는 건 너밖에 없다’는 등의 말과 함께 피해자의 신체를 만졌다. ㄱ씨가 10~11살 때는 ‘샤워를 도와주겠다’면서 화장실에 들어와 신체 일부를 만지기도 했다. 이런 내용은 ㄱ씨가 작성한 고소장과 경찰 진술조서에 적혀 있다. 이 문서에는 아버지의 강제추행 행위가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최소 9회 발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2019년 10월 ㄱ씨는 가족을 떠나 독립했다. 아버지의 폭행이 결정적 계기였다. ㄱ씨는 형사고소를 진행했고, 사건은 가정법원으로 넘겨져 아버지는 보호관찰처분을 받았다. 그 뒤 희귀난치병 진단을 받아 투병을 이어가던 ㄱ씨는 트라우마 전문 심리상담소에서 상담을 받던 중 아버지의 행위가 범죄였다는 점을 인지하고 지난해 8월 고소했다. 첫 조사에서 거주지 관할인 ㄴ경찰서의 수사관은 “조사받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투병으로 야윈 몸을 보고 한 질문이었다. ㄱ씨는 키 170㎝, 몸무게 40㎏였다.
첫 조사는 지난해 8월17일 오후 7시부터 2시간30분 남짓 진행됐다. ㄱ씨는 아버지의 성폭력 행위를 기억나는 대로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했다. 사건 현장의 공간 구조, 당시 자신이 입고 있던 옷, 아버지의 자세와 행위, 말 등을 진술했다.
사건은 아버지 주소지 관할인 서울 서초경찰서로 이첩됐다. 이첩 사실은 ㄱ씨가 경찰에 문의해 알았다. ㄱ씨의 경찰 진술 뒤 추가 조사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피해자 조사는 그걸로 끝이었다. 서초서는 피의자 조사, 참고인 조사를 거쳐 1월24일 ㄱ씨에게 불송치 결정서를 보냈다. 사유는 이랬다. ‘①피해자는 성인이 된 이후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고소한 것으로 기억에 의존하여 진술하였다. ②피의자는 혐의 부인하고 있으나, 참고인의 진술과 대부분 일치하고, 오히려 피해자의 진술과 상반되는 부분이 있어 피해자의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③피해자의 주장 외에는 달리 혐의 인정할만한 증거나 진술이 부족하다.’
ㄱ씨는 이 결과를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친족성폭력이 어린 시절 발생했으니 당연히 기억에 의존해 진술할 수밖에 없다. 이를 이유로 불송치 결정을 한 것이 납득되지 않는다”며 “진술이 상반되면 거짓말 탐지기 등으로 검사해 볼 수 있는 것 아니냐. 추가 조사 한번 없이 사건을 종결한 것이 과연 적절한 수사냐”고 했다. ㄱ씨는 결국 지난달 14일
경찰의 재수사를 요청하는 글을 청와대 국민청원 누리집에 올렸다. 이 글에서 ㄱ씨는 “친족성폭력은 어린 시절에 일어나 물증이 없다. 그래서 피해자의 증언이 곧 증거가 된다”며 “조사에 동석한 국선변호사도 이만큼 구체성을 갖췄으면 ‘특정성’이 성립될 것이라 했는데, 서초서는 어떤 부분에서 진술이 구체적이지 않아 불송치라는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인지, 또 어떤 수사가 이뤄졌는지 알고 싶다”고 썼다.
서초서 여성청소년과 관계자는 <한겨레>에 “고소인의 주장을 뒷받침할 다른 증거나 참고인 진술이 없었고, (첫 조사에서) 고소인이 기억나는 사항을 충분히 진술했다고 보아 추가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거짓말 탐지기 등을 제안하지 않은 이유는 이 사안에 대해서는 진행을 해도 의미 있는 결과가 도출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찰은 “검찰에서도 서류 검토 후 경찰 의견대로 하라고 해 마무리가 된 사건”이라고 덧붙였다.
ㄱ씨는 “(마지막 가해 행위 이후) 20여년 만에 용기를 내 아버지의 성폭력을 고소했는데 너무나 쉽게 없던 일이 되어 참담하다. 이첩된 경찰서의 담당 수사관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진술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이토록 결과를 수용하기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ㄱ씨는 이의신청을 해 재수사를 요청할 계획이다.
친족성폭력은 어린 시절 피해가 발생하고 성인이 되어 고소하는 경우가 많아 혐의를 입증하기 쉽지 않다. 친족성폭력 생존자이자 성폭력 피해자 지원 활동가인 김영서 작가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나의 경우 수사관이 ‘너의 잘못 아니다’라며 수치심을 덜어주었고, 내 진술에서 실마리를 찾아 가해 행위 날짜를 일일이 특정해 주었다”며 “가해자와 피해자 기억에 의존해 수사를 해야 하는 친족성폭력 사건의 경우, 수사관의 의지와 관점, 역량이 여느 분야보다 큰 차이를 빚는다”고 말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발표한 ‘2019년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통계 분석’을 보면, 전체 친족성폭력 피해자의 51.7%가 13살 미만의 어린 나이에 피해를 겪었으며, 55.2%가 피해 발생 10년 뒤에야 처음 상담을 받았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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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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