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민우회가 지난해 일고민상담실에 들어온 주요 상담 사례 147건을 분석해보니, 직장 내 성희롱 사례가 66.67%로 가장 많은 것으로 분석됐다. 클립아트코리아
“직장상사의 고백을 거절했더니, 괴롭힘이 시작됐어요.” “성희롱에 거부 의사를 밝히자 가해자인 상사가 업무와 관련해서 어떤 지시도 하지 않고 말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괴롭히더라고요.” “성희롱 피해를 봤는데, 가해자인 상사에게 내가 사랑받는다는 식으로 회사에 소문이 났어요.”
지난해 한국여성민우회 일고민상담실로 들어온 노동상담 사례들이다. 고백을 거절하거나 성희롱에 거부 의사를 밝히자 괴롭힘이 시작되기도 했고, 왜곡된 소문이 퍼지는 등 동료들의 2차 가해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여성노동자를 향한 직장 내 성희롱과 괴롭힘이 더욱 교묘해지면서, 여성들이 이중 피해에 노출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6일 한국여성민우회가 2021년 한 해 동안 일고민상담실에 들어온 주요 상담 사례 147건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상담 건 가운데 직장 내 성희롱이 98건(66.67%)으로 가장 많았고, 직장 내 괴롭힘 21건(14.29%), 고용형태에 의한 차별 7건(4.76%), 모집‧고용상 성차별 6건(4.08%) 순이었다. 이밖에 부당해고, 노동조건 등 기타 노동사안이 15건(10.2%)이었다.
민우회는 지난해 접수한 직장 내 성희롱·괴롭힘 사건에서 주목할 대목으로는 ‘성희롱과 괴롭힘의 복합성·확장성’을 꼽았다. 상담 사례를 보면, 성희롱과 괴롭힘은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성희롱 이후 상사가 업무와 관련해서 어떤 지시도 하지 않고 말도 안 걸었다”, “고백을 거절했더니 직장 내 괴롭힘이 시작됐다” 등의 피해가 보고됐다.
고용노동부가 직장 내 성희롱과 괴롭힘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분리해 처리하는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민우회는 “피해자가 겪은 피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파악하지 않으면, 각각의 성희롱과 괴롭힘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단될 가능성이 크다”며 “고용노동부는 전후맥락을 고려해 통합적으로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고 했다.
‘여성혐오 정서에서 비롯된 노동권 침해’ 사례도 주목해야 할 대목으로 꼽힌다. ㄱ씨는 민우회 상담에서 “신체접촉을 자주 겪었는데 예민하다고 그럴까 봐, 또 페미X이라고 할까 봐 두려워서 참았다”고 했다. ㄴ씨는 “‘너 페미냐’라는 말에 (그만하라고 했더니) 너의 반응이 재미있는데, 너 말고 다른 누구를 괴롭히겠니”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민우회는 “여성혐오 문화가 팽배한 소규모 사업장에서는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했을 때,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 등으로 (피해자를) 낙인찍으며, 문제제기를 무력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짚었다.
연이어 발생한 공직사회 내 성폭력 사건도 일터의 피해 여성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됐다. 지방자치단체장의 성폭력 사건에서 오히려 피해자가 비난받는 여론이 형성되거나, 조직에서 적절한 보호조치를 받지 못한 일들을 지켜본 여성노동자들은 성희롱을 당해도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성희롱 피해자인 공무원 ㄷ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서울시장 뉴스를 접하다 보니, 피해사실을 알리는 게 나한테도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됐다. 그냥 조용히 가해자와 분리만 되면 좋겠다”고 했다.
코로나19 여파도 성희롱·괴롭힘 피해자를 움츠러들게 했다. 2020년부터 지속된 코로나19 사태는 서비스직, 비정규직 등 불안정한 일자리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성희롱·괴롭힘 피해를 겪더라도 직장을 잃지 않기 위해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ㄹ씨는 “코로나19 상황에서 힘들게 구한 일자리인데, 내가 일을 그만둬야 할까 봐 성희롱·괴롭힘을 신고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민우회는 직장 내 성희롱·괴롭힘 문제가 끊이지 않는 이유로 회사의 부적절한 대응 등을 꼽았다. 이 단체는 “용기를 내 신고한 피해자를 ‘조직을 시끄럽게 하는 사람’으로 낙인 찍고, 온갖 트집을 잡아 문제제기를 무력화시키는 등 피해자를 고립시키는 사례가 많았다”며 “‘성희롱 경력단절’은 노동자(피해자)를 배척하는 회사에 의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노동자의 문제제기에 소극적으로 대응해온 고용노동부를 놓고서도 “회사가 사건을 제대로 처리했는지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기계적으로만 판단한 사례들이 많았다. 이런 사례가 반복된다면 노동자는 일터에서 겪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라고 했다.
박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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