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수 주에 사는 ㄴ씨는 “MY BODY MY CHOICE”(내 몸은 내가 결정한다) 문구를 퀼트로 작업했다. ㄴ씨 제공
지난 24일 미국 연방대법원이 헌법적 권리로서 임신중지권을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었다. 미국 내 한인 여성들 사이에서도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들 사이에선 임신중지권 보장이 각 주의 자율적 판단에 맡겨지면서 임신중지 합법 주로 이사 하겠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보수 주인 애리조나에 6년째 사는 한인 ㄱ(26)씨는 “현지에서는 이번 결정에 굉장히 분노하는 분위기다. 판결이 있던 날 밤에 동네에서 갑자기 시위가 열려 참여했다. 뉴스를 보고 다들 화가 나서 거리로 뛰쳐나온 것 같았다”고 말했다. ㄱ씨는 “아무래도 애리조나에서는 임신중지가 불법이 될 것 같아 임신중지 합법 주로 이사를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보수 주에 사는 ㄴ(35)씨는 “여기는 6주 이후 임신중지가 금지될 것 같다. 생리를 안 해서 테스트기를 하면 이미 임신 4주다. (예약이 신속하게 되지 않아)테스트기 확인 뒤 2주 안에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 임신중지를 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이곳 여성들은 임신중지를 하려면 6시간 넘게 운전해 다른 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ㄴ씨는 “피임약은 앞으로도 보험처리가 될지, 남편이 정관수술 해야 하는 게 아닐지, 자식을 낳는다면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키워야 할지 등등 여러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미국의 여러 회사는 이번 판결 뒤 여성 노동자에게
다양한 지원을 약속했다. 이를 반기는 목소리와 함께 기업의 도움은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ㄱ씨는 “내 파트너가 다니는 회사는 뉴스가 나오자마자 공문을 보내 ‘오늘 이 일로 스트레스 받은 직원이 있으면 휴가를 쓰라’고 했다”고 말했다.
구글은 이번 판결로 영향받는 직원이 근무지 재배치를 요청할 수 있도록 했고 아마존·메타·애플 등도 직원이 임신중지 시술을 받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길 원한다면 경비를 부담하겠다고 발표했다.
뉴욕에 사는 신지수(27)씨는 “임신중지는 개인적인 행위이고, 주 정부가 알게 되면 처벌받을 사안인데 이걸 회사랑 공유하기가 쉽지 않다. 검사에게 기소되면 그것까지 회사가 지원해줄 수 있겠는가”라고 우려했다.
보수 주에 살면서 회사의 지원을 받을 수 없고 이사를 할 형편이 되지 않는 여성들은 이번 판결로 받는 영향이 더 심각하다. 신씨는 “임신중지가 불법인 주들 대부분은 엄청나게 보수적이고, 여성 인권이 제대로 보장되어 있지 않고, 가난한 인구의 비율 또한 높은 경우가 많다. (…) 이미 힘든 사람이 (이번 판결로) 더 어려워질 수 있는 점이 걱정스럽다”고 했다. ㄱ씨는 “친구들의 페이스북에 ‘갑자기 캠핑친화적인 다른 주로 급하게 캠핑 여행을 가야 하는 일이 생기면, 내가 캠핑 짐을 싸고 운전하는 일을 도와줄 수 있어. 아무에게도 당신의 캠핑에 대해 말하지 않을게’라며 임신중지를 돕겠다고 암시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고 했다.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은 이번 판결에서 개인 의견으로 대법원이 동성결혼과 피임권 보장 판례도 재검토할 의무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급격한 ‘인권 후퇴’를 예상하는 사람들은 미국에서 지내기가 불안하다고 호소한다.
신씨는 “종신직인 대법관 9명 중
6명이 보수 성향이라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소수자의 권리가 후퇴할 거 같아 무섭고 걱정”이라고 했다. ㄴ씨는 “이제 동성결혼이 다음 타깃이 될 것이다.… 백인, 남성, 이성애자, 기독교인 등이 아니면 모두 혐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미국인 아내를 둔 한국인 남성 배아무개(43)씨는 “한국 지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아내가 미국 지사에 지원해 조만간 미국으로 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미국에서는 총기를 사용한 극단적인 폭력이 일어나는 곳인데 여기에 더해 인권 부분이 크게 후퇴해버리니 미국으로 가는 것이 맞는지 고민된다”고 했다.
이주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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