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가족부가 25년째 해마다 발표하는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보고서 이름을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으로 바꿨다. 보고서는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구조적 성차별이 공고한 점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런데도 여가부는 성평등 정책 관련 주무부처라는 존재 의미를 스스로 부정하듯 ‘여성’이란 이름을 지우는 모양새다.
6일 여가부는 ‘2021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 보고서를 발표했다. 정부는 1997년부터 양성평등주간마다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보고서를 발표해왔다. 보고서 이름이 바뀐 건 25년 만이다. 이 보고서는 각종 통계로 여성의 현실을 조명하고, 이를 국가 정책에 반영한다는 목적을 갖고 작성된다.
1년 만에 분위기는 달라졌다. 보고서 제목에선 ‘여성’이 삭제됐고, 내용 면에서도 여성의 삶을 집중해 드러내기보다는 남녀의 통계를 나란히 놓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여가부 관계자는 “20여년 동안 사회는 많이 변화했고, 보다 종합적인 시각에서 파악하기 위해 분야별로 남녀의 통계를 분석하면서 이름을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으로 바꿨다”고 설명했다.
정작 보고서 속 일부 통계는 구조적 성차별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걸 보여준다. 2021년 규모가 1천명 이상인 공공기관 및 지방공사·지방공단 여성 임원 비율은 2020년보다 각각 2.5%포인트, 0.9%포인트 하락한 4.4%, 3.7%를 기록했다. 규모 1천명 미만의 공공기관에서도 여성 임원 비율은 3.0%포인트나 하락한 7.1%를 기록했다.
‘노동시장’ 분야 통계는 여성 일자리의 양과 질이 여전히 남성보다 낮은 걸 드러냈다. 2021년 여성 고용률은 51.2%로 남성보다 18.8%포인트 낮았다. 또 여성은 남성보다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과 저임금 노동자(중위임금의 3분의 2 미만인 노동자) 비율이 높았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는 전체 여성 임금노동자의 47.4%로, 남성보다 16.4%포인트 높았다. 여성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남성보다 11%포인트 높은 22.1%였다. 또 여성 임금노동자의 시간당 임금은 1만5804원으로 남성(2만2637원)의 69.8%에 그쳤다.
여성이 다양한 젠더 폭력에 노출된 현실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020년 기준 성폭력 피해자 수는 3만105명이었고 이 가운데 여성은 2만6685명(남성 1972명, 미상 1448명)으로 88.6%였다. 같은 해 가정폭력 검거인원은 5만2431명으로 2011년(7272명)에 견줘 7.2배 늘었고, 데이트폭력 검거인원은 8982명으로 2016년(8367명)보다 1.07배 증가했다.
가정 내 성역할 고정관념은 개선됐지만, 현실은 제자리걸음인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 가사를 ‘공평하게 분담해야 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여성 67%, 남성 57.9%였다. 이 응답 비율은 성별 관계없이 꾸준히 높아지는 추세다. 그러나 가사분담 실태를 보면 ‘공평하게 분담한다’는 응답은 여성 20.2%, 남성 20.7%에 그쳤다. 인식과 현실 간 차이가 컸다.
2021년 규모가 1천명 이상인 공공기관 및 지방공사·지방공단 여성 임원 비율은 2020년보다 각각 2.5%포인트, 0.9%포인트 하락한 4.4%, 3.7%를 기록했다. 여성가족부 ‘2021 통계로 본 남녀의 삶’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구조적 성차별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는데 여가부가 보고서 이름을 25년 만에 바꾸는 등의 움직임을 보이는 것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여성학회장인 김현미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과)는 “정부 부처가 통계를 조사하는 목적은 구체적이고 섬세한 정책을 구상·집행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여가부는 이러한 정책 목표를 설정하기보단, 수치적이고 기계적으로 양성평등을 내세우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이란 제목은 남성이 기본값인 한국 사회에서 통계적으로 여성이 차별받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며 “내용에선 큰 변화가 없는데 표현만 ‘여성’에서 ‘남녀’로 바꾼 거라면, ‘현 정부의 여가부는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다루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로 보인다. 여가부는 여성이 처한 구조적인 현실을 보고자 한 보고서의 원래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보고서는 9개 분야(인구와 가구·노동시장·일생활균형·경제상황·사회안전망·의사결정·여성폭력·건강·사회인식)의 50개 통계를 분석했다.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이번 통계를 밑거름 삼아 우리 사회의 남녀 현실을 잘 반영하는 정책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세부 추진 과제를 마련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박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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