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 출범식이 지난 8월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리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지난해 1월부터 ‘낙태죄’ 처벌 조항의 효력이 사라졌지만, 대체입법과 가이드라인 부재로 임신중지를 원하는 임신부는 물론 산부인과 의사들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3일 시민건강연구소의 ‘성·재생산 건강 연속기획Ⅰ―임신중지를 의료로서 보장하기’ 보고서를 보면, 산부인과 의사들은 임신중지 시술을 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으로 ‘심리적 부담’과 ‘업계 분위기’를 꼽았다. 이는 임신중지를 둘러싼 윤리적 차원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표준화된 절차나 임상 가이드라인조차 존재하지 않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연구소는 2020년 5~7월 산부인과 전문의 6명, 임신중지를 경험한 여성 11명, 시민사회 활동가 11명 등 모두 28명을 심층 면담해 이 보고서를 마련했다.
면담에 참여한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임신중지를 원하는 이에게) 임신중절 시술을 해주고 싶어도 다른 의사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돼 위축되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전문의는 “보통 산부인과에서는 임신중절(수술)을 하지 않는 것을 직업적 윤리로 생각한다”며 “(대학에서부터) 그렇게 교육받아 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성의 존엄과 자기결정권이 강조되기보다는 ‘태아 건강을 위해 일하는 것이 소명’이라는 분위기가 업계에 강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임신중지에 따른 태아의 ‘관리와 처치’도 부담으로 지목됐다. 현행법에 따르면 임신 4개월(16주) 미만의 태아는 의료폐기물로 처리하고, 4개월 이후의 태아는 장례를 치러야 하는 사산아로 분류된다. 그러나 사산이 아닌 자의적 임신중지의 경우 처리 방법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없다. 의료기관이 ‘알아서’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다. 연구소는 “이런 임의적 상황은 임신중절 서비스를 하는 의료진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임신중지를 경험한 여성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도 보고서에 담겼다. 면담에 참여한 여성 11명은 모두 임신 8주 이내에 임신중지를 했는데, 이들 가운데 9명(81.8%)이 내과적 방법(약 복용)이 아닌, 외과적 방법(수술)을 택한 것으로 집계됐다. 신뢰할 만한 의약품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다수는 “(의사에게서) 수술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연구소는 “임신중지를 필수의료로 여기고 관련 서비스를 기존의 여성 건강 정책에 포괄해야 한다”며 “의사들이 전문가 윤리에 따라 양질의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하루빨리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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