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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2050여성살이] 누가 성폭력의 본질을 흐리나

등록 2006-03-07 16:41수정 2006-03-08 14:23

요즘 한국 사회의 인기 검색어로 ‘왕의 남자’와 ‘국회의원의 여기자 성희롱 파문’을 빼놓을 수 없다. 두 가지를 동시에 떠올리는 이유는, 성별 구분을 규정하는 단어가 만들어내는 의미로 볼 때, 한 가지는 비슷하고 한 가지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일단 어느 누구도 ‘왕’과 ‘국회의원’의 성을 따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사건은 닮아 있다. 예로부터 대부분의 왕은 남자였고 정치의 영역은 어떤 것보다 남성의 영역으로 생각되었다. 여성 국회의원의 숫자가 늘었음에도 권력자의 상징적 성은 여전히 ‘남성’이다. 국회의원의 성희롱을 머릿기사로 다룬 방송사의 뉴스에서도 여기자의 ‘여’자만 노란색을 입힌 굵은 글씨로 기사 제목을 달았다. 문제의 국회의원은 심지어 이름까지 ‘여성스러운’ 사람이었는데도 성을 밝히지 않으면서, 굳이 기자의 성만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성희롱 할만한 국회의원은 남자이고 성희롱 당할만한 대상은 여자라는, 선정적인 성별 구분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심지어 부추기는 행태다.

권력자와 관계된 상대의 성을 따져볼 때는 두 사건이 정반대의 코드로 읽힌다. ‘여왕’이 아닌 바에야 ‘왕’은 남자임이 분명해서 ‘왕의 남자’라는 제목이 풍기는 동성애적인 코드는 노골적이기까지 한데, 이 영화를 그렇게 읽는 이는 흔하지 않다. 만약 제목이 ‘왕의 여자’였다면 왕과 여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그 은밀함까지 상상했을 것이다. <왕의 남자>가 “역사 속에서 현실 정치의 역학을 배운다”는 공적인 이유로 정치인들까지 동원할 수 있는 것은, ‘왕’과 ‘남자’ 사이의 권력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섹슈얼한 일들을 짐짓 모른 척하는 공모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치와 권력과 역사의 문제이지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왕의 남자는 권력자인 남성의 손 안에 있지만 ‘남자’이기 때문에 그 섹슈얼리티가 훼손되지 않고, 국회의원에게 성희롱 당한 여성은 기자라는 전문직임에도 ‘여자’이기 때문에 ‘여’기자로 과도하게 강조된다.

“아름다운 꽃을 보면 누구나 그 향기에 취하고 싶고, 다가가 만져보고 싶은 것이 자연의 순리”라며 동료 국회의원을 감싸 안으려는 이의 논리도 그렇다. 성폭력의 본질은 권력 관계임에도 이 문제를 슬쩍 스쳐지나가면서 남자의 ‘수작’과 여자의 ‘허술한 방어’라는 성별 이데올로기로 무마한다. 여자를 괴롭히는 남자들의 행동을 사적인 로맨스로 치부하는 이런 덜 떨어진 생각들 때문에, 성폭력 사건들은 도무지 공적인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여자는 왕이 되건, 왕의 여자가 되건, 성희롱의 피해자가 되건, 늘 그 섹슈얼리티를 의심받으며 ‘개인적인 관계’의 당사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동에 대해 ‘자연의 섭리’ 운운하고, 성희롱을 재연하면서 상대 당을 공격하는 여야의 공방전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사적으로’ 놀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정박미경/ 자유기고가 chaos400@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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