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여성

내 물길이 작아질 때, 다른 물길들과 섞일 수 있어

등록 2023-02-18 13:59수정 2023-08-16 18:55

[한겨레S] 이병남의 오늘도 성장하셨습니다
은퇴 뒤 다시 찾아간 회사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한겨레S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세요. 검색창에 ‘에스레터’를 쳐보세요.

지난해 12월 초, 엘지(LG)전자 홈어플라이언스(가전사업본부)의 창원공장을 방문했습니다. 20년 만이었습니다. 저는 감회가 깊었습니다. 그리고 1987년 노동자 대파업 때의 한 선배 경영자가 생각났습니다. 그분은 새로 취임한 최고경영자(CEO)로서 전례 없던 파업사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와 한동안 현장에서 근무하며 공장 기숙사 시설과 구내식당의 열악한 현실을 파악했습니다.

“직원들을 닭장에서 재우고, 짬밥을 먹이면서 어떻게 그들의 헌신과 열정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한탄하면서 회사를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파업 종료 이후엔, 한달 동안 아침마다 공장 정문 앞에 서서 출근하는 직원들을 고개 숙여 인사하며 맞았다고 합니다. 이는 엘지전자의 이른바 ‘공동체적 노경관계’의 시작입니다. 그분이 매일 아침 직원들을 향해 인사하던 정문을 제가 지난 겁니다.

‘좋은 동료’가 되기 위해 해야 할 것

그로부터 10년 뒤인 1997년 외환위기가 닥쳤습니다. 엘지는 생존을 위해 사업 구조조정을 해야 했고, 엘지전자의 백색가전사업도 매각 후보 중 하나였습니다. 이른바 ‘백조 프로젝트’(Swan Project)였습니다. 엘지는 당시 세계 최대 가전사업을 운영하던 제너럴일렉트릭(GE)과 매각협상을 진행했으나, 상대가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을 제시해 그룹 최고경영진은 고뇌가 깊었습니다. 당시 사업을 맡고 있던 ㄱ부사장은 “그 값에 파느니 차라리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라며 나섰습니다. ㄱ부사장의 소신 중 하나는 ‘5%는 불가능해도 30%는 가능하다’(5% 향상 목표를 잡으면 기존의 방식을 유지한 채 개선 방법을 찾지만, 30% 수준의 목표가 생기면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다)였습니다. 그룹 경영진은 백색가전사업을 매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2002년 ㄱ부사장이 매달 이틀 동안 진행하던 현장지도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제게 생겼습니다. ㄱ부사장은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넓은 제1공장, 제2공장을 걸어 다니며 각 부서의 보고를 받고, 그 자리에서 바로 ‘예스·노’ 결정을 내렸습니다. 현장에서 만든 개선안을 놓고 벌이는 토론은 치열했습니다. 질책은 없고 격려는 풍성했습니다. 현장에서 ‘5%는 불가능해도 30%는 가능하다’를 현실로 만들어내는 그 장면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는 ‘Business is a noble calling’(비즈니스 이즈 어 노블 콜링: 사업은 고귀한 소명)을 절감했습니다. 사업은 단순히 돈 버는 행위가 아니라, 무에서 유를 만들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고귀한 소명’임을 제 가슴에 새긴 날이었습니다. 이틀 동안 배운 현장지도 섀도잉 학습은 은퇴할 때까지 제게 회사생활의 나침반이었습니다.

20년 만에 다시 돌아본 공장은 더 이상 과거의 공장이 아니었습니다. 현장 노동자들은 아이티(IT)·로봇·에이아이(AI)를 이용해 미국 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냉장고와 세탁기를 13초에 한대씩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공장 한쪽에는 노동자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토론할 때 사용하는 쾌적한 회의실도 있었습니다. 외환위기 때 ‘매각 후보’였던 회사는 미국 가전회사 ‘월풀’을 누르고 세계 1위에 올랐고, 가전공장으로는 처음으로 세계경제포럼이 인증한 등대공장(Lighthouse factory: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로 제조업 혁신을 이끄는 공장)으로 선정됐습니다. 7년 전에 문을 연 20층짜리 연구개발(R&D)센터는 창원시의 랜드마크가 됐습니다.

그 센터에서 북토크를 했습니다. 코로나 탓에 직원 200여명은 온라인으로 참가했고, 계단식 강의실에는 사업본부장, 사업부장 임원, 그리고 중간관리자 등 약 50여명이 자리했습니다. 저는 정문에 들어서면서 느꼈던 그 감동으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 선 것이 영광스럽습니다. 회사를 이렇게 성장시키다니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은 우아한 백조(Swan)가 되셨습니다.” 저는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했습니다.

북토크 세션에서 후배들이 가장 궁금해했던 것은 제가 현직에서 겪었던 어려움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겪었던 실패를 솔직히 공유했습니다. 메시지의 핵심은 “어려움을 어떤 마음으로 겪어내는지가 중요하다”였습니다. 동료 직원과의 관계 설정을 물어보는 이에게는 “사람 좋은 상사가 되려 하지 말고, 직원들의 신뢰를 먼저 얻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일단 신뢰가 생기면 부드럽고 강한 모든 소통 방식을 쓸 수 있어 아주 실용적이니까요. 두 시간이 번개같이 지나갔습니다. 북토크가 끝난 뒤 사업본부장인 ㄴ사장은 “저는 동료와 눈맞춤 같은 기본적인 것도 실천 못 했다는 반성이 듭니다”라는 진솔한 감상을 얘기해 주기도 했습니다.

서울로 오는 열차 안에서 저는 현장에서 받은 감동으로 가슴이 계속 뜨거웠습니다.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한 환대에 명정하게 깨어 있으면서도 편안함과 행복감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는 더 이상 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사람인데, 왜 내 얘기에 집중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내 얘기를 통해서 스스로를 느꼈다’는 데 생각이 닿았습니다. 매일 일에만 파묻혀 살다가 문득, 자기 자신을 만난 게 아닐까 싶은 거죠. 제가 회사 다닐 때 스스로 존재를 확인하고, 하는 일에 대한 의미가 분명해졌을 때 진정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현직에서 ‘치·치·집’(치열·치밀·집요)으로 일하며 성취한 것이 계기가 돼 후배들이 저를 초청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만일 제가 은퇴 뒤 ‘느·조·심’(느리게 조용히 심심하게)으로 삶의 모드를 전환하지 않았다면 이 만남이 이렇게 감동스럽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계 맺기는 에너지 교환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끼리 관계를 이어간다는 건

물길이 섞이려면 상대에게 내가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스며들기 위해서는 내가 작아져야 합니다. 에고 수축을 통해서 나라는 입자가 작아지면 상대에게 스며들면서 그 에너지로 상대는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상대가 자기 자신과 만나게 되면, 그는 스스로를 만나게 한 나를 알아보게 됩니다.

며칠 전 닥종이예술가인 이종국 작가에 관한 텔레비전 방송을 보았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삶이란 닥종이와 먹의 관계처럼 서로 스며드는 것이고, 스미고 번지고 젖어들면서 진정한 나를 만난다’고 합니다.

“나를 내려놓고 자연에 빠져서 그냥 스며들듯 살면 돼요.”

예, 사람 간의 관계 맺기도 그런 것 같습니다.

2016년 엘지(LG) 인화원장으로 퇴임하기 전까지 ‘치열하고 치밀하게 집요하게 사는 것’을 모토로 삼았다. 은퇴 뒤 삶의 방향은 ‘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다. 은퇴와 노화를 함께 겪으며,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기록한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혐오와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지금, 한겨레가 필요합니다.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근무지 이탈해 ‘먹방’ 촬영한 휘문고 현주엽 감독 감봉 처분 유지 1.

근무지 이탈해 ‘먹방’ 촬영한 휘문고 현주엽 감독 감봉 처분 유지

“울 엄니 만나러 가요, 굿바이” 김수미 직접 쓴 유서곡 2.

“울 엄니 만나러 가요, 굿바이” 김수미 직접 쓴 유서곡

‘친윤의 한동훈 낙마 프로젝트’ 유포자 5명 검찰 송치 3.

‘친윤의 한동훈 낙마 프로젝트’ 유포자 5명 검찰 송치

[단독] 도이치 2차 주포, 김건희 포함 “초기 투자자 엑시트 시켜줬다” 4.

[단독] 도이치 2차 주포, 김건희 포함 “초기 투자자 엑시트 시켜줬다”

‘핑크 치킨’이 출몰하는 세상 5.

‘핑크 치킨’이 출몰하는 세상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