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20일(현지시각) ‘2022 국가별 인권보고서’를 발표하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미국 정부가 올해 발표한 국가별 인권보고서에서 우리나라 형법이 강간죄 구성 요건을 폭행·협박으로만 규정해 신고와 기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을 문제로 지적했다. 강간죄 구성 요건을 폭행·협박이 아닌 상대방의 동의 여부로 보는 ‘비동의 강간죄’를 형법에 신설할 계획이 없다는 우리 정부 태도와는 대조적이다.
미 국무부는 20일(현지시각) 공개한 ‘2022 국가별 인권보고서’에서 한국은 강간을 “가해자의 폭행 또는 협박 여부를 기준으로 판단한다”며 “좁은 법적 정의, 명예훼손을 금하는 법률, 그리고 여성에 대한 만연한 차별로 인해 강간 및 가정폭력이 신고와 기소가 되지 않는 경우가 지속되고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에서 언급된 ‘명예훼손을 금하는 법률’은 성폭력 가해자들이 피해자의 입을 막기 위해 무고죄와 함께
명예훼손죄로 피해자를 고소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미 국무부는 지난해 발표한 ‘2021 국가별 인권보고서’에서도 한국이 강간죄 법적 정의상 “피해자의 동의 여부는 고려하지 않는다”며 이것이 저조한 신고 및 기소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실제로 성폭력은 가해자의 물리적인 폭행이나 명시적인 협박을 수반하지 않는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하고 있다. 2019년 1~3월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소속 66개 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강간(유사강간 포함) 상담사례(총 1030명)를 분석했더니 직접적인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피해사례가 71.4%(735명)에 이른다. <한겨레>가 지난 2월 확인한 여성가족부의 ‘
2022 성폭력 안전실태조사’(초안)도 성추행 피해 당시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다고 응답한 여성 비율은 각각 2.7%, 7.1%에 그쳤다.
하지만 보고서의 지적대로 우리 형법은 강간죄를 가해자의 폭행·협박 여부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다. 특히 2018년 한국 사회에서 ‘#미투’(나도 고발한다) 운동이 확산하면서 상대방 동의 없이 또는 상대방 의사에 반하여 이뤄진 성관계를 성폭력 범죄로 처벌하는 ‘비동의 강간죄’를 신설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지만, 법 개정은 5년째 제자리다. 윤석열 대통령은 성폭력 처벌법에 무고 조항을 신설하는 것을 지난해 대선 당시 공약으로 내건 바 있으며, 법무부는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할 뜻이 없다고 선을 그은 상태다.
미 국무부는 이번 보고서에서 지난해 9월 발생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을 언급하며, 한국의 스토킹 범죄가 “중요한 사회 문제”임을 지적하기도 했다. 보고서는 서울교통공사 전 직원 전주환(32)이 같은 직장 동료인 피해자에게 2019년부터 불법촬영물과 협박 메시지 등을 보낸 일, 피해자가 2020년 10월 전주환을 고소했지만 같은 달 법원이 증거 인멸과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전주환의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한 일, 전주환이 지난해 9월 선고공판을 하루 앞두고 피해자를 살해한 일 등을 기술했다. 전주환은 올해 2월 징역 40년을 선고한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한 상태다.
보고서는 또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인 김용민씨의 동성 배우자 소성욱씨가 자신의 피부양자 자격을 박탈한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법원이 지난해 1월 원고 패소 판결을 한 일을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또는 성별 표현, 성별 특성에 기인한 폭력 행위, 범죄화, 기타 가혹행위’의 한 사례로 소개했다. 소성욱씨는 비록 1심에서는 패소했지만 올해 2월
항소심에서 승소했다. 이 사건은 건보공단이 항소심 판결에 불복해 상고하면서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아울러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주로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에서 온 이주여성들이 언어 장벽과 사회관계망 미비로 인해 가정폭력과 같은 인권침해에 더욱 취약하다는 점을 언급했다.
오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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