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씨는 2021년 8월 서울 지하철 전동차 안에서 무릎까지 내려오는 원피스를 입고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여성의 전신과 다리를 불법촬영한 혐의로 기소됐다. 지난해 1월, 법원은 ㄱ씨가 피해자 의사에 반해 ‘불법촬영’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ㄱ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ㄱ씨가 촬영한 피해자의 신체 부위가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신체에 해당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2018년 이른바 ‘레깅스 사건’ 이후 성폭력 범죄를 처벌할 때 피해자의 감정이 아닌 가해자의 행위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법을 바꿔야 한다는 요구가 잇따랐지만, 법무부 등 유관기관들의 반대 속에 관련 법 개정 논의가 몇년째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7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최근 법안심사소위원회를 열어 성폭력 처벌법(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기재된 ‘성적 수치심’이라는 표현을 ‘성적 불쾌감’이나 ‘사람의 신체를 성적 대상으로 하는’ 등의 표현으로 바꾸는 것을 뼈대로 하는 4개의 개정안을 심사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개정안은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말·영상을 보낸 사람을 ‘사람의 신체를 성적 대상으로 하는’ 말·영상을 보낸 사람으로 바꿔, 피해자의 감정이 아닌 가해자의 행위에 초점을 맞췄다. 현행 성폭력 처벌법이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꼈는지 아닌지를 성폭력 범죄 성립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어 피해자가 부끄러운 감정 또는 심한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판단되면 위 사례처럼 가해자의 성폭력 행위가 죄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지적에 따라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법무부와 법원행정처는 법 개정이 이뤄질 경우, 처벌 범위가 지나치게 확장될 수 있다며 ‘신중 검토’ 의견을 내놨다. 법무부 등은 지금도 ‘성적 수치심’ 해석에 있어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거나 부끄러움을 실제로 느낄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서울지방변호사회도 “현재의 ‘수치심’보다 더 개방적인 표현이 되면 법 집행기관이 자의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며 반대에 나섰다.
법무부 등의 이런 반대는 ‘유죄→무죄→유죄 취지 파기환송→유죄’를 오가며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레깅스 사건’을 계기로, 피해자의 다양한 피해 감정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성적 수치심의 의미를 넓게 확장한 2020년 대법원 판결에 역행하는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레깅스 사건은 2018년 5월, 버스에서 레깅스를 입은 여성의 하반신을 불법촬영해 1심에서 벌금 70만원형을 받았던 남성이 항소심에서 무죄를 받아 논란이 된 사건이다. 2심 재판부는 당시 “기분(이) 더러웠다”는 피해자의 진술을 들어, 성적 수치심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며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2020년 12월 “성적 수치심은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으로만 나타나는 게 아니고 분노, 공포, 무기력, 무력감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며 이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이에 따라 법무부 ‘디지털 성범죄 등 전문위원회’는 지난해 3월 성폭력처벌법에서 ‘성적 수치심’을 ‘사람의 신체를 성적 대상으로 하는’으로 바꾸는 권고안을 발표했고,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같은 해 7월 성범죄 양형기준에서 특별양형인자 가중요소 용어를 ‘성적 수치심’에서 ‘성적 불쾌감’으로 바꾸기도 했다.
여성단체 및 전문가들은 피해자에게 피해 당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물으며 피해를 증명하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가해자의 행위를 따져 묻는 방식으로 하루 빨리 법이 개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재련 변호사(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는 “수치심과 같은 주관적이고 모호한 개념을 성폭력 범죄 구성요건에 그대로 두는 것이야말로 죄형 법정주의와 명확성의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대표도 “성폭력 피해자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다양하다”며 “성폭력 피해자를 바라보는 잘못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법령에서 성적 수치심이란 용어를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류벼리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도 “수사기관과 법원이 성인지적 관점에서 사건의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고, 피해자다움에서 비롯된 선입견과 편견을 배제할 수 있는 성인지 감수성도 함께 갖춰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법사위는 다음 소위에서 관련 법안 심사를 계속 이어나가기로 했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