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강남의 한 고층 건물에서 10대 여성이 추락해 숨진 가운데, 이 여성이 활동했던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의 ‘우울증 갤러리’에서 남성 회원들이 여성 회원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의혹이 커지고 있다. 특히 10대 여성 회원들이 성인 남성의 주요 표적이 돼 왔다는 증언이 나왔다.
‘우울증 갤러리’ 이용자였던 정수연(가명·18)씨는 이 갤러리에서 알게 된 ㄱ씨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21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정씨는 “우울증 갤러리에서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ㄱ씨와 친해졌다. ㄱ씨가 만나자고 해서 지난해 7~9월 사이 서울에서 만났는데, 거부했는데도 ㄱ씨가 계속 내 몸을 만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ㄱ씨는 정씨에게 “네 자취방에 가서 눕자”, “자취방이 싫으면 모텔에 가자”며 성관계를 요구했다고 한다. 정씨가 ㄱ씨의 연락을 받지 않자, ㄱ씨는 우울증 갤러리에 정씨의 신체적 특징을 묘사하며 정씨를 비방하는 글을 올렸다. 정씨는 “새로운 여성이 우울증 갤러리에 자신의 SNS 계정을 공개하면, 만남을 요구하는 남성들의 연락이 쏟아진다”며 “우울증 갤러리에서 성인 남성들이 여성 특히 미성년자를 만나는 목적의 99%는 성관계”라고 말했다.
ㄱ씨가 10대 여성에게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건 정씨가 처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해 5월 우울증 갤러리에는 ㄱ씨가 오희연(가명·당시 17살)씨의 신체를 만지고, 불법 촬영했다는 폭로글이 올라왔다. ㄱ씨는 이에 대해 “만나서 가슴과 성기를 만졌다. 난 잘못한 거 하나 없다”고 인정하는 취지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정씨는 “ㄱ씨가 이 사건에 대해 자신은 억울하다고 했지만, 내가 거부했는데도 성추행한 것 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이용자인 김나라(가명·18)씨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우울증 갤러리에서 만난 성인 남성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우울증을 앓고 있던 김씨는 지난해 8월 이 갤러리에서 자신의 힘든 상황을 이야기하며 한 남성과 친밀해졌다. 오프라인 만남으로 이어진 자리에서 이 남성은 김씨가 자는 사이 김씨의 휴대전화 속 개인정보를 불법 촬영했다. 김씨의 휴대전화엔 우울증 일기와 사진 등 내밀한 내용이 많았다. 김씨는 “그가 우울증 갤러리에 나에 대해 ‘강증(강제로 개인신상을 커뮤니티에 공개하는 행위)’할까 봐 두려워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었다”며 “성범죄의 온상이 된 우울증 갤러리를 폐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씨와 김씨가 겪은 일은 ‘그루밍 성범죄’와 유사하다. 그루밍은 아동·청소년을 성착취할 목적으로 신뢰관계를 쌓는 행위를 뜻하는 말로, 아동·청소년의 취약한 지점(경제적 어려움, 관심)을 노려, 신뢰관계를 쌓은 뒤 통제해 성착취하는 것을 뜻한다.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는 “미성년자가 우울증을 겪어 심리적으로 취약한 것을 이용하는 전형적인 그루밍 성범죄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울증 갤러리에서 한 성인 남성이 10대 여성을 상대로 그루밍 성범죄를 저질러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가 있다. 2020년 ㄴ씨는 우울증 갤러리에서 알게 된 서희진(가명·당시 14살)에게 ‘도와주겠다’며 접근해 사진과 전화번호 등을 요구했다. 이후 서씨를 만나 “신상정보를 퍼뜨리겠다”고 협박해 서씨에게 성폭력을 저질렀다. ㄴ씨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아청법)을 위반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으나 1심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죄질이 나쁘다”면서도 “잘못을 인정한 점, 합의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우울증을 앓아 정신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놓인 여성들을 타깃으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에 디시인사이드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대표는 “디시인사이드와 같은 플랫폼이 미성년자를 유인하거나 하는 접근에 대해 경고를 하거나 상습적이면 계정을 차단하는 등의 적극적인 조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승윤 서울시 다시함께 상담센터 부소장은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태이든 아니든 성인이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궁박한 상태를 이용해 성행위하는 것은 범죄다.
가해자를 특정해 처벌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며 “디시인사이드가 이런 상황을 방조했다면 이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서울 강남경찰서는 16일과 17일 각각 디시인사이드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해당 사이트를 차단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디시인사이드 쪽은 〈한겨레〉에 “갤러리를 폐쇄할 경우 정상적인 이용자들이 본인이 저작권을 가진 게시물을 열람하지 못하는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며 폐쇄 요청에 거부 입장을 밝혔다.
채윤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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